[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아이들이 질문을 많이 하는 것이 좋을까? 질문 없이 무거운 것이 좋을까?

질문은 호기심과 통한다. 호기심은 뇌를 자극하고 가슴을 열게 하기에 미래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이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아이들은 명랑한 얼굴로 질문을 많이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채로운 질문들이 오가는 사회가 좋을까? 질문다운 질문 없이 주어지는 대로 굴러가는 사회가 좋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 역시 명약관화하게 첫 번째가 될 것이다.

고대 사회에 형법이 강했을까? 민법이 강했을까? 세계적으로 저명한 어느 법인류학자는 이러한 질문을 품게 되었다. 고대 사회에 형법이 강했다는 담론이 지배적인 시대였다.

지배 담론에 대한 의심 및 반발이 그의 가슴을 자극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움튼 그 질문을 따라 그는 치열한 연구를 해나갔다. 그가 얻은 결론은 고대 사회에 형법보다 민법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고대 사회가 형법과 민법 중 어느 것이 강하냐에 따라 그 사회가 달라진다. 형법이 강했다면 범죄가 많았다는 뜻이며 민법이 강했다면 돈 거래나 애정 문제 같은 것이 많았기에 그 사회가 범죄나 폭력보단 사람 내음이 나게 흘렀으리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다시 말해 고대 사회를 보는 시각이 변화되며 해석이 달라지는 것이다.

인류의 시작이 과연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하는 광활한 통찰을 열어주며 인간에 대한 해석 역시 그런 지평 속에 가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질베르 뒤랑이라는 프랑스의 훌륭한 학자는 어느 저서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인류사에 시와 종교가 있는 문명이 많은가, 과학이 있는 문명이 많은가.

질문 자체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질문은 그런 식으로 통 크게 이미 굳어져 있는 것들에 대한 판단 성격이 있는 것이 좋다.

상식적으로 봐도 전자가 많을 것이다. 물론 과학 세계도 다채롭고 수준 또한 다양하기에 어느 문명에 시와 종교가 강하더라도 과학이 배제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세부적인 질문들도 뒤랑의 책을 읽을 때 있었다는 기억이다.

뒤랑의 이 질문이 있고 그에 대한 탐구를 뒤랑 자신이 해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들이 자동적으로 해결된다. 거대한 질문들은 그런 힘이 있다. 가령 과학지상주의에 입각한 현대문명은 인류사에서 절대적인 환상으로부터 상대적인 위상으로 자리매김 된다. 뒤랑은 말한다. 과학도 하나의 상상이며 또다른 상상 즉 또다른 과학도 가능하다고. 과학지상주의로 인한 폐해에서 자유롭지 않은 현대문명에 대한 대안적 지평을 열어주는 말이다.

상기한 법인류학자나 뒤랑의 질문은 인류에 있었던 중요한 질문들 중의 극히 일부일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이 역사에 전환점을 만들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갔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개인적으론 우수하다는 평이 세계적으로도 나 있으며 개인들의 잠재력 또한 뛰어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질문다운 질문이 거의 없는 사회가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초등교육 이전부터 시작해 교육의 마지막 단계까지도 그렇고 다른 분야들에서도 상황이 비슷하다. 각종 회의실에서나 술자리 등 모임에서 창의적인 질문이나 대화를 만나기 쉽지 않다. 그런 사실은 곧바로 개인들의 잠재력이나 끼를 발휘시키지 못하고 움츠리게 만든다. 동시에 사회의 발목을 잡고 문화의 창의적 향상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런 사례들은 우리나라 도처에 즐비하다. 그로 인해 현실이 답답하고 지루한데 미래를 기약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질문 자체가 봉쇄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 기분이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