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내가 언제 사람을 처음 죽였냐면..." GD는 덤덤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버릇같은 한숨을 간간이 섞어가면서 한참동안 무거운 고백을 이어갔다. 들어보니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하지만 의사인 GD는 자신이 돌보던 환자의 사망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GD의 급발진은 변호사 업무 스트레스를 토로하던 나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의사들이 안고 사는 생명에 대한 책임감과 거기에서 오는 심리적 압박감을 듣다보니 나의 고민은 스머프 동산의 이야기가 돼버렸고, 우울감은 자연스레 치료되었다. 이후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업으로 의사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GD는 의사로서 수백 명의 환자를 돌보고 있다. 그리고 큰 병원을 경영하는 병원장으로서 수백 명 피고용인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기도 하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이제껏 수억원을 지역 비영리 단체에 기부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세상에 끼치는 선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행은 대부분 알려져 있지 않다. INFP 찐(眞)아싸 성격의 영향이다.  

신비주의 행보 덕에 그는 점잖은 은둔의 병원장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는 낮과 밤이 다른 GD의 은밀한 사생활을 잘 알고 있다. GD는 어릴 때부터 엄청난 악동이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둘이 크고 작은 사고를 쳐서 선생님께 야단맞는 것은 일상이었고, 그의 장난 전화로 우리집이 발칵 뒤집어 진적도 있다. 개그맨 소질도 있어서 친구들과의 일화를 맛깔나게 재현해서 나의 배꼽을 빼놓기도 한다. 어쩌면 GD가 의사가 된 것은 대한민국 코미디계의 큰 손실일 수도 있다.  

친구들은 GD를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부른다. 친구들의 가장 큰 지원군이다. 지금도 다른 친구들의 제안에는 왠만해서 '노'가 없다. 나에게만 빼고. 나의 제안은 들어보지도 않고 일단 '노우!'를 외치고 본다. 마치 영화 혹성탈출의 유인원의 리더 시저가 각성한 후 정확한 입모양으로 '노우!'라고 외치는 모습처럼... 물론 그렇게 툭탁거리는 관계가 된 데에는 나의 책임도 없지 않다. 나는 늘 착한 GD 앞에서 수십 년째 깐족거리고 있으니 서로 피장파장이다. 

GD는 지역사회에서 유명한 의가의 막내로 태어났다. 가족들은 그가 의가의 맥을 이어주길 바랬다. 의사가 될 마음이 없었던 GD는 졸업하던 해에 공대로 진학하려다 실패했다. GD는 서울에서 재수생활을 했다. 나 역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던 터라 함께 어울렸다. 수업을 마치고 교문을 나오면 대학생인 나를 기다리던 재수생 GD를 만날 수 있었다. 그가 기흉이 터져 입원한 날에도 신촌에서 나와 함께 놀고 있었다. 산통에 비견되는 기흉의 통증을 참으며 놀만큼 그는 노는데 진심이었다. 리스펙!

GD는 재수 끝에 의대에 진학하여 의가의 전통을 이었다. 그가 나와 함께 열심히 놀다가 명문 의대에 진학하는 것을 보고 나도 자극을 받아 대학교를 자퇴했다. 다들 무모한 짓이라 말렸지만 GD가 되면 나도 될 것만 같았다. 나는 이듬해 법대에 진학했고 덕분에 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 GD가 내 인생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에 주된 원인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많은 의대생들이 그러하듯 GD는 졸업 후 전문의를 준비했다. 레지던트 마지막 해 큰 사건이 터졌다. 전문의 시험을 보려면 수련 병원에서 레지던트 명단을 시험기관에 보내야 했는데 병원의 실수로 GD를 명단에서 누락시켰다. 결국 GD는 그 해 전문의 시험을 볼 수 없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멱살을 잡았을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GD는 의연했다. 의사가 없는 시골로 내려가 어르신들을 돌보면서 쏘쿨~하게 1년을 보냈다. 이듬해 전문의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친구 가족의 임종은 대부분 GD가 지킨다. 친구들은 임종이 가까워진 부모님들을 편히 모시고자 GD의 병원을 찾다보니 그의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다. 유족들도 그간의 정성에 고마워한다. 하지만 나는 GD가 그런 사망에서 조차 자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담담하려고 노력하는 그의 눈에는 슬픔이 묻어있다. GD는 다른 조문객이 갈 때까지 빈소 한 켠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우두커니 자리를 지킨다.  

권택인 변호사
권택인 변호사

십여년 전 친구 J의 배우자가 투병 끝에 하늘나라로 갔을 때에도 그녀를 끝까지 돌본 사람도 GD였다. '죽음은 아무리 마주쳐도 익숙해지지 않는다'며 입에 쓴 소주를 연거푸 털어 넣었다. 친구 아내의 때이른 죽음은 죽음을 마주하는 것이 일상인 그에게도 맨정신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는지 GD는 그날 크게 취하였다.  

GD는 의사로 살기에 너무 인간적이다. 섬세하고 어진 심성을 가진 그에게는 누군가의 생명이 조금씩 꺼져가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천형(天刑)같은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GD는 형벌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매일 술을 마신다. 술에 젖고 나서야 안정을 찾는 GD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짠하다. GD가 세상에 대해 좀 더 뻔뻔스러워 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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