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발굴 뒷얘기-103.진천 송두리 유적(2)

/ 이융조 충북대학교 박물관장ㆍ한국선사문화 연구원장

발굴현장에서 수습된 숯은 38점이었는데 이 가운데 11점이 물푸레나무속으로 그리고 나머지 시료들은 작고 부스러져서 일차적으로 활엽수라고 필자의 연구파트너인 박원규교수(충북대 농업생명환경대 연륜연구센터 소장)와 김요정교수는 판단하였다.

이로 보면 이 당시의 기후는 한랭한 쪽보다는 온난하면서도 습기가 많은 환경, 예를 들면 계곡이나 하천환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되었다.

또한 이 시료들은 연대측정 자료로도 쓰였는데 김종찬교수(서울대)의 분석 결과 아주 정확한 연대를 얻게 되었다. 10개나 되는 시료들이 후기 구석기 말기인 12,500년 전과 45,000~49,000년에 이르는 중기 구석기연대로 밝혀져 이들 문화층의 절대연대를 세우는데 큰 기준이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발굴된 유물들을 보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기 구석기시대 유적인 전곡리유적과 비교되는 특징을 갖고 있어(지도위원인 배기동 한양대학교 박물관장의 견해) 오히려 전기 구석기시대의 특징을 보여준다는 해석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현장발표에 참석하였던 지도위원들은 하마터면 그냥 파괴될 뻔 하였던 송두리유적의 구석기문화상에 놀랐고 여기서 출토된 많은 자갈돌석기에 큰 관심을 표시하였다. 특히 협곡유적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구석기유적의 독특한 형성조건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로 평가받았다.

특히 이들 유물들의 출토지점이 원지층에서라기보다는 재퇴적된 상태, 즉 보다 이른 연대에 제작된 석기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점이 주목받았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다른 나라의 조사에서도 유적의 형성과 그 해석에 대한 좋은 지침을 얻게 된 셈이다.

현장발표시(2004. 2. 12)에는 우리나라 구석기연구의 개척자이시며 필자의 지도교수이신 손보기교수를 비롯하여 허문회교수(서울대 명예교수)와 정영화(영남대)·한창균(한남대)·이기일(조선대)·이헌종(목포대)·이형우(전북대)교수 등 우리나라 구석기학계를 이끄는 많은 학자들이 참가하여 유적에 대한 중요성의 인식을 같이 하였다.

여기에 참가한 거의 모든 구석기학자들은 이 유적이 도로의 한가운데 있어 파괴가 불가피한 유적이라는 점을 무척 안타까워했으며, 이 유적과 연결된 지역을 계속하여 확대 조사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 유적의 특이한 점은 자갈돌로 만든 사냥돌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는 사실이다. 약 40여점의 크고 작은 사냥돌들이 발견되었는데, 대개 약 1kg정도의 큰 것과 약 600g정도의 중간치, 300g의 작은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사냥돌들은 현존하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사냥에 쓰는 각종 사냥돌들의 구성과 흡사하여 고고학 유물과 민족지 자료의 관련 연구의 필요성을 생각하게 한다.

또한 이 유적이 다른 학자들의 주장처럼 재퇴적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치부하기에는 여러 다른 양상들이 나타나고 있어 필자는 오히려 협곡으로 이루어진 유적자연환경을 이용한 막집을 세웠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이 유적의 현장발표에 참석한 임병무국장(당시 중부매일)이 매번 그러하듯이 재치어린 표현으로 ‘사냥돌 공장’이라고 한 것은 아주 적절한 평이라고 지금까지도 생각하고 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사냥돌만을 분석하여 이승원선생은 석사학위를 얻게 되었는데 그가 지금까지 송두리유적 조사에 노력한 보답을 받은 셈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송두리유적의 문화상으로 사냥돌이 출토되는 대표적 유적으로 평가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유적의 성격을 뚜렷이 하였다고 하겠다.

이들 유적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결과는 프랑스에서 구석기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공수진박사(현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조사연구 실장)와 여러 젊은 친구들이 노력하여 곧 보고서를 낼 준비를 하고 있어 기대가 크다.

이 유적을 조사하는 동안 필자와 조태섭박사는 틈틈이 짬을 내어 주변지역을 답사한 결과, 상당히 넓은 범위의 고토양층에서 여러 점의 석기를 채집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이 유적은 우리나라 최대의 단일 구석기유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출토범위를 가지고 있고 우리 모두 큰 관심을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현장발표회를 끝내고서 이러한 문화적 성격과 그 의미 그리고 개발로 인하여 파괴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진천군 김경회군수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지속적인 조사가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관심과 여기에 대한 의사표명이 없는 형편이라 결국 이 유적도 다른 유적과 마찬가지로 많은 상처를 입고 있는 중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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