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예민하고 복잡한 사건과 의뢰인의 절절한 사정으로 머릿속이 소란스러워진 어느 날 밤 우발적으로 결정했다. 특정한 곳에 가고 싶어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부존재하고자 떠나는 여행이었다. 일상과의 단절이 필요했다.

일상과 물리적 거리를 두기위해 떠나는 여행인 까닭에 목적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멀수록 좋다. 스마트폰을 열고 무작정 항공권을 검색했다. 항공권 수요ㆍ공급 곡선이 형성한 가장 저렴한 곳이 나의 목적지가 된다. 이런 여행이 지금 당장 처해있는 나의 복잡한 정신상태가 초래한 특이한 케이스는 아니었다. 오래 전부터 나만의 여행은 대개 즉흥적으로 결정됐고 일정은 무계획했기 때문이다.

목적이나 의지를 가지고 여행지를 정하지 않으니 세부 여행일정까지 꼼꼼히 계획할 리가 없다. 돈은 환전이 가장 편한 달러 몇 장이면 해결된다. 여행지를 하루 종일 걸어 다니고, 적당한 곳에서 길거리 음식을 먹으니 큰 돈을 지출할 일도 거의 없다. 예상 밖의 돈이 필요하면 신용카드를 사용하면 될 일이다.

여행 준비라 할 만한 것도 없다. 여권과 지갑, 스마트폰만 주머니에 있으면 된다. 다만 명색이 해외여행인데 빈손으로 털레털레 가기 민망해서 가벼운 가방 하나를 메고 간다. 당장 갈아입을 양말과 속옷 한 벌을 넣어 가방용도에 맞는 구색을 갖춘다. 세면도구는 숙소에서 제공받고 여벌옷은 현지에서 조달한다. 그것은 귀국 후 훌륭한 기념품이 된다.

이런 무모한 여행은 일정표에 지배되어 사는 변호사의 보수적이고 예측가능한 삶에 대한 소심한 저항 같은 것이다. 무계획한 여행을 통해 히피족 코스프레를 하며 나에게 아무 관심없는 도시의 뒷골목을 이방인이 되어 누비면서 일상과의 단절을 즐긴다.

이번 여행을 결정한 날 항공권 수요ㆍ공급곡선의 접점은 호치민을 가리키고 있었다. 베트남은 코로나 관련 이슈에서 가장 자유롭기도 했다. 그냥 예전처럼 비행기를 타고 입국하면 된다고 하니 별도로 준비할 것이 없다. 준비하고 대응하는 삶에 지친 지금의 나에게 적절한 여행지다.

다섯 시간이 넘는 긴 비행시간 역시 나에게 큰 매력이었다. 기내에서 권장하는 스마트폰 비행모드는 IT기술로 24시간 세상에 로그인되어 있던 나를 그 시간만큼 로그아웃시켜 주었다. 비행시간은 완벽하게 나만의 시간을 보장해 주었다. 승무원이 친절을 베풀기에 친절하게 괜찮다고 하였다. 나에게 가장 좋은 서비스는 그냥 두는 것이다.

구름 몇 개 지난 것 같은데 도착 안내방송이 나오는가 싶더니 호치민 공항 활주로의 거친 착륙 진동이 전해졌다. 입국 수속을 일사천리로 마치고 달러를 베트남 통화로 환전하고 공항 밖으로 나왔다. 바로 앞에 호치민 시내가 보인다. 공항이 시내와 바로 붙어 있는 것이 여느 공항과 달랐다. 시내로 나가려고 택시를 잡으러 가는데 길 건너편에 시내버스가 보였다.

일단 타고 보았다. 경험상 세계 어디든 공항을 운행하는 버스는 관광지나 번화한 곳을 경유한다. 뚜렷한 목적지 없이 걷는 것이 목표인 나에게는 사전에 목적지를 말하고 타야 하는 택시보다 버스가 여러모로 적당하다. 목적지는 버스가 정해주었다. 어디에서 내려도 그곳을 나의 여행지로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버스 창밖으로 도심에 있을 법한 거대한 현대식 빌딩이 보였다. 그곳부터 숙소로 이동하는 것을 호치민에서의 첫 번째 여행일정으로 결정했다. 하차하여 종으로는 꼬리를 물고 횡으로는 거대한 벽을 이룬 오토바이 행렬을 길벗삼아 호치민 거리를 걸었다. 가는 길에 노점에서 산 반미 샌드위치가 나의 호치민 여행 첫 끼가 되었다.

구글 지도를 보며 숙소에 도착했다. 당황스러웠다. 호텔이라 생각하고 예약한 숙소가 실은 중년의 현지인 부부가 운영하는 홈스테이였다. 객실에 드나들 때마다 속옷차림의 호스트가 거주하는 거실을 지나야 했다. 호스트는 거실을 지날 때 마다 함박웃음을 머금고 식사를 권했다. 거절하기 어려웠다. 다른 손님들도 호스트의 호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몰도바(몰랐는데 유로존에 속한 조그만 나라라고 한다), 터키, 인도, 일본 등에서 온 여행객들은 졸지에 여행기간 내내 함께 식사하는 식구가 되었다. 대학시절 하숙집 정서 그대로였다. 자국 이야기, 환율, 전쟁, 개인사 등 다양한 이야기가 식탁 위를 오갔다. 인상 깊은 여행정보는 다음 날 나의 여행일정에 반영되었다.

여행 내내 호치민 곳곳의 관광지, 박물관, 미술관, 재래시장 등을 도보로 이동했다. 프랑스 식민시대풍 건물과 베트남 스타일 건물들이 무질서 속에서 묘한 조화를 이루며 섞여 있는 거리를 걸었다. 배가 고파지면 거리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낮은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하거나, 걷다 지치면 거리 카페에서 행인들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것 자체로 훌륭한 여행이 되었다. 3일간 8만보 가량 걸었던 호치민 뒷골목의 여운을 가지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권택인 변호사
권택인 변호사

일상의 무게를 덜어주고 그 빈 자리를 영감과 에너지로 채워줬던 호치민은 다시 가고 싶은 여행지가 되었다. 귀국 후 두 달 뒤 다시 호치민을 방문했다. 피하기 위해 간 것이 아니라 그곳에 가고 싶어서 간 여행이었다.

그렇다고 나의 무계획 여행의 원칙을 영영 버린 것은 아니다. 다음 여행지는 항공권의 수요공급 곡선이 정해주는 우연한 곳으로 정해질 것이다. 그곳이 언제 어디가 될지 나도 궁금하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