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노트] 정혜연 플루티스트

길었던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두 번째로 맞이하는 겨울, 지난해 겨울은 그다지 춥지 않았던 덕에 새삼 한국의 강한 추위를 경험하는 중이다. 아, 그래, 잊고 있던 차디찬 한국의 겨울.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패딩으로 온 몸을 꽁꽁 싸매고 눈밭을 걷는 이들 가운데 어느새 나도 동참한다.

이런 혹독한 추위에서도 꼿꼿이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있다. 바로 수선화다.

흔히 알고 있는 수선화의 속명은 나르키수스(Narcissus)이다. 이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라는 청년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나르키소스는 연못 속에 비친 자기 얼굴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물속에 빠져 죽었는데, 그곳에서 수선화가 피었다고 한다. 그래서 꽃말은 그의 전설을 따서 자기주의, 자기애를 뜻하게 되었다.

자기애의 흔적으로 피어난 수선화. 왜인지 한편으론 참 외롭게 느껴진다. 사실 알고 보면 나르키소스가 자신의 모습만을 사랑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저주'가 있다. 바로 님프인 에코(Echo)의 사랑을 거절한 이유로 아프로디테에게 벌을 받아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게 된 것. 그러나 그는 그대로 죽지 않고 숨을 거둔 자리에 수선화로 다시 피어났다.

이렇듯 자기애와 강한 생존력을 의미하는 꽃, 수선화를 주제로 한 한국 가곡이 있다. 바로 김동명 시, 김동진 작곡의 수선화(1942)다. 김동명 시인의 수선화는 일제강점기 아래서 저항하는 자세와 정신으로 쓴 시로 흔히 해석되는데, 김동진 작곡가가 이 시를 읽자마자 악상이 떠올라 순식간에 작곡한 곡으로 유명하다.

이 곡은 예술 가곡답게 음악적으로 가사들의 의미가 잘 전달되어지게 작곡됐다. 여기서 예술 가곡이라 함은 시에 곡을 붙인 음악형식을 말한다. 우리가 잘 아는 성악곡들은 크게 가곡과 오페라로 구분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듯이 가곡은 시 위에 음악이 입혀졌다고 한다면 오페라는 극이나 소설책을 바탕으로 음악을 입힌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가곡과 오페라 모두 가사전달이 잘 되어야 한다는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 그 가사인 김동명의 시 수선화가 있다.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끝없는 고독의 위를 나는 애달픈 마음 / 또한 그리고 그리다가 죽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또 다시 죽는 가여운 넋은 아닐까 / 붙일 곳 없는 정열을 가슴에 깊이 감추이고 찬 바람에 쓸쓸히 웃는 적막한 얼굴이여 / 그대는 신의 창작집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불멸의 소곡 / 또한 나의 작은 애인이니 아아 내 사랑 수선화야 나도 그대를 따라 저 눈길을 걸으리'

이 시에서 수선화는 마음, 넋, 얼굴, 소곡, 애인 등으로 은유되며 죽었다가 살아나고, 쓸쓸하고 적막하지만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불멸의 소곡으로 표현된다. 이 시의 의미를 잘 전달하기 위해 작곡가는 어떤 장치를 넣었을까. 우선 박자는 4분의 2박자로 애달픈 분위기로 시작하며 가여운 넋을 표현한다. 이후 전조와 함께 조금 더 밝은 분위기의 4분의 3박자로 변화하며 가여운 수선화가 불멸의 소곡과 작은 애인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잘 표현하였다. 동시에 후반부에는 굉장히 폭이 큰 다이나믹(셈여림)을 요구하며 곡의 극적인 요소를 이끌어낸다. 마지막 문장을 보면 계속 다른 언어로 은유되던 수선화가 '내 사랑 수선화야'로 직접적으로 언급이 되는데, 이 부분을 포르티시모(ff, 매우 크게)와 악센트(accent,특정 음 강조)를 사용해 그 적극성을 느낄 수 있고 마지막 음을 피아니시시모(ppp, 매우 여리게)로 표현하여 그 마음의 굳건함을 더욱 느낄 수 있는 듯하다. 어쩔 때는 큰 소리보다 내면의 작은 소리가 더 강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 않은가. 소프라노 조수미씨의 음반을 들으면 이 극적인 감정의 표현을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혜연 플루티스트
정혜연 플루티스트

이 곡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가사가 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 또 다시 죽는' 언뜻 보면 너무 좌절스러운 말이기도 하다. 이미 죽었는데 다시 살았다가 또 다시 죽는다니. 그러나 우리가 아는 수선화를 생각하면, 결국 또 다시 살아난다. 한해가 가고 다시 겨울이 오면 피어난다. 마치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이게 끝인가 싶다가도 길은 있고, 무너지나 싶다가도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이 우리 안에 가득하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수선화를 닮았다. 삶의 의지는 언제나 혹한에서 시작된다. 이 추운 겨울은 결국 나를 단단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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