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범욱 공사발전후원회 명예회장·㈔한국수필가연대 회장

해와 달이 뜨고 지며 한밤의 캄캄한 적막이 기울면 보이지 않는 하루가 간다. 생명의 불꽃인 태양에 삐딱하게 기울어진 지구의 기울기 탓일까? 그것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전과 공전을 하며 춘하추동이라는 사계의 탈바꿈 속에 한 해가 저문다. 태양인 어머니 품을 벗어난 지구인가? 하늘에서 태양이 멀어지면 지구촌은 움츠러들며 찬 겨울이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눈이 돼 온 세상에 눈꽃을 피우며 세상만사 어지럽고 더러운 것을 흰 눈으로 덮어준다. 1960년대 학창시절 즐겨 부르던 샹송 가수 최양숙의 노래 '눈이 내리는데' 그 정경 그대로 평온과 고요 속에 온 누리가 평화스러워진다.

러시아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나르크의 영화 '닥터 지바고'다. 노벨 문학상까지 선정된 작품이지만 소련 공산정권의 제제로 출국까지 하지 못하며 수상이 거부된 소설이다. 종합예술의 장르 속에 영화가 제작돼 설원을 배경으로 한 영화음악 '라라의 테마'는 감동의 선율로 눈만 내리면 애창곡이 된다. 근세 러시아의 전쟁과 혁명의 격동기에 배우 오마 샤리프와 줄리 크리스티가 주연하는 유리 지바고의 삶과 사랑을 그렸다. 우랄산맥을 넘어 바리키노 시골로 숨어들어 지바고는 유리아틴을 오가며 토냐와 라라로 이어지는 사랑의 행로다. 이곳도 피할 수 없는 감시에 라라를 다시 도피 시켜야 하는 공산주의 사회적 분위기다. 쌍두 썰매 마차에 그녀를 실려 보내며 유리는 건물 이층 까지 뛰어 올라간다. 성에가 낀 유리창을 깨고 멀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정경은 잊을 수 없는 설원의 파노라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시인이다. 농부에 유명대학의 캠퍼스 상주 시인으로 방학이 되면 농장으로 돌아가 일생을 자연과 함께한 시인이다. 퓰리처상을 네 번이나 수상한 계관시인으로 '환희에서 지혜로 끝나는' 그의 명시 '눈 내리는 밤 숲가에 멈춰 서서(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는 자연의 섭리가 자신의 삶으로 이어지는 시구다. 눈송이 휘날리며 소복소복 쌓여 가니 어두운 밤이라도 숲속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게 끔 만든다. 캄캄한 밤, 숲, 얼어붙은 호수, 눈송이, 바람 등 대자연 속에 유일의 동물인 작은 말과 함께 나누는 무언의 영적 대화다. '잠들기 전 갈 길이 멀구나' 는 점점 눈이 쌓여 가니 해야 할 일에 갈 길까지 멀어져 늦어지는 잠자리다. 다시 반복되는 후렴은 인생의 마지막 길! 죽음에 앞서 '영원히 잠들기 전 해야 할 일' 지켜야 할 약속을 일깨워 주는 내면의 성찰인 '버킷 리스트'다.

눈 내리는 서정의 낭만도 잠시 잠깐! 눈이 쌓여 가니 쓸어내고 치워주어야 한 발짝이라도 움직인다. 도심지 인근의 시골에서 잔뼈가 굵어 온 사람으로 옛 농가 생활의 단상이 떠오른다. 집 울타리를 경계로 안마당과 뒷마당이 있고 이른 아침 일찍이 화장실을 가려면 대문 밖으로 나서야 한다. 비록 한가한 겨울인데도 눈만 내리면 걱정이 앞선다. 간밤에 소리 없이 내린 눈으로 아버지는 '눈 치우자며' 단잠을 깨운다. 밖으로 나서니 설경에 영화 닥터 지바고의 음악이 그대로 흐른다. 흔적 없는 흰 눈 위를 참아 밟기 아쉬운 순수함 속에 앞 뒷마당과 사람들이 통행하는 주변 길까지 치운다. 해가 솟아오르니 이웃집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오며 바쁜 사람들은 그 길을 따라 총총히 사라진다. "잘되는 집안은 남달라야 한다"는 선친의 말씀에 이른 새벽부터 눈 쓸고 길까지 터주니 아침밥이 꿀맛이었다.

갈수록 도시는 확장되고 다양화되고 있다. 겨울에 눈만 내리면 설국이 되니 지나간 민선 4기(2006-2010년) 남상우 청주시장의 이야기다. 재임 시절 눈만 오면 새벽부터 산하 공무원들을 깨워 비상을 거니 모두들 불평이었다. 동향 친구에 어린 시절부터 시골에서 눈을 치운 경험이 있는 막역지우로 지금도 교류를 하고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지난 12월 5일 고등학교 동기생모임으로 상경해 점심을 들며 자리를 같이했다. 남 시장 재임 시절 눈 치우는 이야기가 수록된 산문집 '현존재의 사유'를 전달하며 지난날의 정담을 나누었다.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자연현상일까! 다음날 청주는 이른 아침부터 눈이 내리며 추워지니 도로가 살얼음판이 돼 출근길에 교통대란이 일어났다. 구관이 명관인지 남 시장을 찾는 일간신문의 기사로 화젯거리가 되었다. 안전불감증에 얼마 지나지도 않은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독불장군에 대비하라! 대비하라! 소리 없는 아우성을 외쳐본다.

이범욱 공사발전후원회 명예회장·㈔한국수필가연대 회장
이범욱 공사발전후원회 명예회장·㈔한국수필가연대 회장

지구 온난화 '라니냐' 현상인가? 때 이른 한파에 눈 폭풍이 몰아치니 삼한사온도 옛말이다. 풋살축구장에 실내 골프연습장을 운영하다 보니 눈만 내리면 걱정이 앞선다. 새벽부터 손님들이 몰려드니 먼발치 진입로 비탈길부터 고무래로 눈을 밀어내고 얼지 않게끔 다시 긴 빗자루로 쓸어주어야 한다. 주차장까지 눈을 치우고 나니 떠오르는 태양에 속옷이 땀으로 젖으며 아침운동이 된 셈이다. 주변을 돌아보니 어느 누구도 자기 집 앞이라도 눈을 치우는 사람은 띄지 않는다. 넓은 대로만 출근길로 바쁜 차들로 꽉 막혀 눈 덮인 차는 운전대 앞창만 빠끔히 뚫어 놓고 앞서가려 빵빵대고 있다. 눈이 내리면 자기도 모르는 설렘과 낭만도 잠시 잠깐이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안전의 사각지대가 프로스트의 지켜야 할 약속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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