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1. 2022년 12월 어느날.. 나는 패소했다.

2. 역사적 판결에 이름을 남기고 싶었다.

3. 잘들어… 내가 권택인이다.

패소했다. 2023년을 며칠 앞둔 2022년 12월 말 어느 날이었다. 얼마 뒤 날아든 패소 판결문은 갑옷을 뚫고 몸을 관통한 날카로운 창처럼 쓰라렸다. 물론 패소한 사건보다 훨씬 더 많은 사건에서 승소했지만 이번 패소 충격은 다른 승소의 기쁨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충격을 느끼는 뇌 부분과 행복을 느끼는 뇌 부분이 따로 떨어져 있어서 충격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 기쁨도 따로 느꼈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뇌는 그렇게 생기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충격 ?2'와 '기쁨 +5'는 서로 가감되어 '기쁨 +3'이 될 법도 했지만 기분의 영역에서는 수학적 계산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마치 화학반응 같았다. 서로 다른 물질의 결합하여 파괴와 생성을 통해 반응 전 물질과는 성질이 다른 물질이 만들어지는 화학반응처럼 충격 ?2와 기쁨 +5의 상호작용은 난감함 +7이라는 전혀 엉뚱한 생성물을 만들어냈다.

나는 자칭 우리 로펌 일타(!) 변호사다. 이길 사건만 선임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승률이 좋았다. 주변 동료들로부터 승소의 아이콘이라는 농담 같은 칭찬을 받기에도 익숙한 터였다. 그 동안 재판 진행 과정이나 선고결과에 대한 내 예상은 의뢰인으로부터 신뢰를 얻기 충분했다.

사건 진행에 대한 나의 의견은 의뢰인들에게 존중받았고 존중받은 만큼의 결과로 응답해왔다. 내로라하는 서울의 대형 로펌들을 상대로 한 대법원 상고사건에서조차 패소없이 승소가 거듭되면서 상황만 주어진다면 확립된 대법원 판례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자신에 넘쳤다.

"잘들어. 내가 권택인이다"라는 농담으로 시작한 표어를 사람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만큼 승소의 영광을 누리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법원이든 의뢰인이든 설득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협상을 통해 적대적인 상대방도 내편으로 만들어 위기를 기회를 만들기도 수차례. 나는 강동6주를 담판으로 돌려받은 서희 장군의 현신이었다.

기회만 오면 대법원 전원합의체 사건 소송대리인 이름에 내 이름 세 글자를 남길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드디어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아파트 분양권 전매 효력에 관한 사건이었다.

명성을 얻을 상황은 적절했다. 그 사건과 관련하여 수십 년간 유지되어온 대법원 판결이 있었다. 나는 그 판결을 깨야 하는 입장이었다. 대법원 판례는 수십 년 전의 법령체계와 과거 현실에 기반을 둔 것이었으나 지금 상황은 그때와 달랐다. 사건에 욕심이 났다. 의뢰인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대법원 판례를 바꿔보자며 헐값에 사건을 선임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수십 년간 유지되어 온 대법원 판례에 반기를 들만큼 용감하지 않았다. 1심은 우리 측 전부 패소였다. 상대방의 소송비용까지 우리가 모두 부담하라는 판결이었다.

신념을 가지고 논리를 펼치다 보니 기존 대법원 판례가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객관적인 사실이 되었다. 법원은 늘 변화에 한 걸음씩 뒤쳐진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법부의 속성이기도 하다. 아직 법원은 바뀐 현실을 모를 뿐이어서 내가 이들을 계몽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법원 판례를 뒤집으려면 전원합의체 판결이 필요했다. 그런 까닭에 당장의 1심 패소는 대법원으로 가는 통과의례였다.

의뢰인을 설득해서 비용을 모두 내가 부담하는 조건으로 항소를 진행했다. 주장과 논거를 두텁게 보강했다. 지금의 판례는 국가의 각종 주택정책, 관련 조세정책을 비롯하여 금융정책을 무력화시키는 측면이 있으니 파기되어야 한다는 점을 논증했다. 나의 논증은 항소심 재판부의 보수성에 또다시 가로막혔다. 패소했다. 나에게 항소심 패소는 판례 변경의 마지막 관문이 보다 험난해졌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이때까지는 아프지 않았다.

사실 패소라고 단정하기에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1심 판결 내용은 우리 측 전부 패소였으나, 항소심에서는 적절한 정산과 소송비용을 각자 부담하라고 판결을 했으니 엄밀히 말하면 무승부쯤 되지 않을까 싶다. 이미 수십 년 동안 유지되고 있는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우리가 전부 패소했어야 마땅하였으니 항소심은 어찌 보면 충격적인 패배라기보다 현실적 승리라고 보아도 무방할 수도 있었다.

내가 구축해 놓은 세계관 속에서 그 사건은 항소심에서 우리가 승소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대법원에서 치열하게 다퉈졌어야 할 사건이었으므로 상고심까지 내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기존 판례를 뒤집고 싶은 변호사의 욕심에 의뢰인의 인생을 걸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패소했다고 하기에는 반쯤은 이긴듯한 애매한 판결이 대법원을 향한 나의 발목을 잡았다. 과거 판례를 유지하고자 하는 법원의 의지는 수십 장의 판결문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족함을 알고 물러나라는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와 같은 판결내용은 잔뜩 독이 오른 나의 승부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지만 동시에 내 의뢰인의 상고의지를 꺾기에도 충분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법원도 의뢰인도 모두 설득하지 못했다. 궁극의 결과를 보지 못하고 항소심의 어중간한 결과에서 나의 진격은 끝이 났다. 어떤 패소보다 아픈 패소였다.

많은 변호사들이 수십 년간 공격했지만 실패했던 난공불락 요새같은 판례를 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겨우 잡았는데 화친을 조건으로 퇴각을 명받은 장수의 심정이었다. 의뢰인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대신 싸우는 대리인에 불과한 변호사의 한계였다.

권택인 변호사
권택인 변호사

지금도 그 대법원 판례는 여전히 리딩 케이스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영혼을 갈아 넣은 논리는 누구도 설득하지 못한 채 무용한 것으로 남고 말았다. 하지만 보수적인 법원도 언젠가는 변화된 세상을 반영한 내 논리를 받아들일 것으로 믿고 있다. 이제 그 역할은 다른 변호사의 몫으로 남겨졌다.

패소는 변호사에게 일상이다. 사람은 실패를 통해 성장하듯 변호사는 패소를 하면서 배운다. 이번 패소는 씁쓸했지만 패소에 대처하는 변호사의 자세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그렇다고 내가 좌절했냐고? 잘들어… 내가 권택인이다.

키워드

#법조칼럼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