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현 칼럼] 한기현 논설고문

1919년 일제에 항거해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진 3.1 운동이 일어난 지 104주년이 지났다. 강산이 10번이나 변했지만 그날의 함성은 오늘도 생생하다.정부는 해마다 3.1절 기념식에서 독립 운동 유공자를 포상하고 있다.올해는 104명의 독립 유공자에게 정부 포상을 수여했다.포상자는 건국훈장 애국장 6명, 건국훈장 애족장 9명, 건국포장 4명, 대통령 표창 85명이다. 이 중 충청 출신은 김언배 선생과 독립운동단체인 '우리회' 회원 김학길 선생 등 9명이다.

충북 제천 출신 김언배 선생은 훈격 4등급인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그는 1920년 8월 만주 독립군 부대인 대한신민단 의연대원으로 국내에 지단을 설치하고 단원을 모집하는 일을 주도했다.봉오동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이후 함경도 일대에서 단원과 군자금을 모집하다 일경에 체포돼 6년간 옥고를 치렀다.

전주사범학교 학생 비밀결사단체인 '우리회' 회원의 독립 유공자 지정 과정은 어렵고 힘들었다.이일남 애국지사는 2019년 자신보다 더 투철한 애국정신으로 독립 운동을 펼친 우리회 친구들이 광복 70년이 지나서도 국가 인정을 받지 못하자 보훈청에 유공자 지정을 신청했다.그는 "나의 말에 거짓이 있다면 1986년 정부가 준 수훈증서를 반납하겠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보훈처는 김학길 선생 등 우리회 회원의 기록이 없다며 국가 유공자로 인정하지 않았다.이 지사 당신은 재판 기록이 남아있지만 친구들은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우리회 유족들은 "보훈처 결정이 부당하다"며 국민권익위원회에 다시 판단해 줄 것을 요청했다. 권익위는 전주사범학교 학적부 등 각종 문헌에서 '우리회' 기록을 분석했다.권익위에 따르면 광복 이후 재입학이 허가된 '우리회' 회원은 8명이다. 이중 김학길씨 등 6명의 재입학 사유는 학적부에 기재돼 있지 않았다. 성적 기록, 출결 기록 등도 공란이었다. 일반 학생의 출석·결석일수 표기와 대조되지만 독립운동을 한 학생들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기 위한 조치라고 해석했다.

1947년 김학길씨의 사촌동생 김학갑씨가 쓴 '만주에 간 둘째형'이라는 책 내용도 주요 기록으로 봤다. 이 책에는 김씨의 만주 활동이 상세히 기술돼 있다. 독립 운동을 함께 한 동지 증언과 회고도 독립 운동 자료로 인정했다.

권익위는 이런 근거를 들어 지난해 7월 18일 "고 김학길 선생 등 11명이 활동한 우리회 독립운동이 확인됐는데도 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며 "보훈처에 공적 심사를 재심사할 것을 시정 권고한다"고 의결했다.

김학길 씨 등 우리회 회원 12명은 애국지사 호소와 권익위의 철저한 조사로 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독립 유공자로 인정돼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충남 부여 출신인 김학길 선생은 전주사범학교 재학 시절인 1942년 '우리의 얼로 우리가 나라를 세워 우리 모두 평화롭게 산다'는 기치로 비밀 조직 '우리회'를 결성했다. 강령에는 '우리는 어머니를 잊자' '우리는 하나의 무명 용사가 되자' 등 독립 운동을 위해 가족은 물론 죽음도 불사하는 문구가 포함돼 회원들의 비장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그는 일본인 학생에게 "일본인은 우리의 적이다"이라고 발언해 충남 부여경찰서에 구금됐다. 1개월 후 풀려나 만주로 갔다. 낮에는 길림성 철공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간도로 이주한 조선 동포들에게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교육했다. 1944년 10월에는 서란현 '조선청년특별훈련소'에서 조선인 200여 명을 대상으로 독립을 외쳤다.선생은 1945년 1월 독립 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로 들어왔다가 일경에 붙잡혀 8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한기현 논설고문
한기현 논설고문

정부는 일제 강점기 음지에서 독립 운동을 펼친 독립 운동가를 적극 발굴해 포상해야 한다.올해까지 1만7천748명의 독립 유공자를 포상했지만 우리회 회원처럼 기록이 부족하거나 없는 숨은 유공자들이 아직도 많다.모두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그들의 희생 정신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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