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인문학] 허건식 용인대 대학원 객원교수·체육학박사

1924년 하와이 원정경기에 참가한 조선야구팀(원안 허 성)
1924년 하와이 원정경기에 참가한 조선야구팀(원안 허 성)

1904년 미국 선교사인 질레트(Phillip L. Gillett, 1874∼1939)에 의해 보급된 조선의 야구는 1912년 11월 해외 첫 원정경기를 위해 일본으로 향했다. 조선팀은 조선에서 일본인들로 구성된 팀을 모두 이긴 최강팀인 YMCA야구팀이었다.

그들은 일본을 방문해 7개 경기중 첫 경기인 와세다대학팀에게 23대0으로 완패했다. 그리고 나머지 경기도 1승 1무 4패를 기록하였는데, 1승 1무의 성과는 일본중학교팀과의 경기였다. 당시 조선 최강의 야구팀의 실력은 일본의 중학생 수준에 불과했다는 이야기다. '일본점령'을 외치며 일본으로 갔던 야구부원들은 귀국길에는 국민들의 비난을 피해 조용히 삼삼오오 귀국했다. 그러나 함께 한 질레트는 이 원정경기가 조선야구가 30년 앞선 일본야구를 접할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해석했다.

1912년 미라우치 일본총독 암살 미수 사건인 '105사건'이 있었다. 이것은 조선총독부가 당시 이 사건의 주동자가 YMCA 부회장이었던 윤치호라고 조작한 사건이다. 질레트는 이 전모를 국제기독교선교협회에 알리려 하였으나 실패하면서 결국 1913년 일제에 의해 추방되었다. 이를 계기로 황성 YMCA는 일본연맹에 예속되면서 야구부원들은 각 학교로 흩어졌으며, 일부 부원들은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결국 YMCA 야구단은 해체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조선의 야구는 흥행하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에서 응원 현수막과 치어리더까지 등장할 정도였고, 전국 각 지에서 야구 경기가 열리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관중이 가득했다. 1923년 2월 미국 시카고 YMCA에서 체육 유학을 다녀온 허 성(1893∼1972)이 귀국해 해체되었던 YMCA야구단을 대신해 1912야구단을 만들었다. 1912는 허 성이 참여했던 1912년 일본원정을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1923년 5월에는 조선야구협회가 정식으로 발족하면서 전국적으로 팀이 증가하면서 야구붐이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924년 허 성은 전국에서 최고의 선수들로 선발된 조선 야구팀 감독을 맡았다. 이 선발팀은 같은 해 6월 조선야구사상 최초로 서양 원정경기가 열리는 하와이로 떠났다. 31세의 허 성은 감독이자 포수를 겸했지만, 체력은 다른 선수들에 비해 월등하고 기량도 우수했다. 무엇보다 허 성과 호흡을 맞출 투수가 하와이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24세로 오레곤 대학 3학년의 필치성이었다.

필치성은 미국 오레곤지역과 하와이에 익히 알려진 인물이었다. 당시 미국의 언론에서는 오레곤대학의 주장인 필치성의 투구 실력과 자신감은 한국의 전통놀이였던 석전(石戰)으로 다져진 것이라고 소개하기도 하였다. 필치성은 대학 야구단에 입단한 해에는 18개 삼진과 무안타를 기록하였으며, 2학년 때는 경기당 평균 15개의 삼진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언더핸드 스로와 사이드 스로를 자유자재로 투구하는 투수이외에 유격수로도 활약하였으며, 2년 차에서는 3할5푼의 타율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또한 1923년에는 오레곤 대학의 주장을 맡으며 '악마 투수'로 언론에 알려져 있었다.

1924년 조선팀의 하와이 원정경기에는 호놀룰루에서 10여년간 성장한 현지 이민자팀인 아사히스(Asahis), 일본, 중국 등이 참가했다. 당시 언론은 조선팀에 대해 깨끗하고 스포츠맨십과 페어플레이를 하는 팀으로 보도했다. 한 두명의 우수한 선수는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체계적이고 안정된 팀은 아니었다. 그러나 1912년 일본에 이어 1924년 하와이 원정경기를 통해 조선야구는 조금씩 성장해 갔다.

2023년 한국의 야구팀은 일본 토쿄돔에서 열린 월드베이스클래식(WBC)경기에 참여하고 있다. 첫 경기에서 호주에 패하고, 두 번째 경기인 일본을 상대해서는 13대4라는 콜드게임 직전까지 가며 완패했다. 한국야구의 몰락을 전세계에 보여 주었다.

1912년 원정경기는 앞선 일본 야구를 배운 대회라는 점에서 조선야구의 가능성을 평가받았고, 1924년 하와이 원정경기는 조선의 야구를 서양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두 원정경기는 일제강점기였지만 야구를 통해 해방된 조국을 꿈꾸었고, 강한 조선을 야구를 통해 만들려 했다. 그러나 2023년 한국팀은 실력은 학생야구 수준으로 몰락했고 선수나 코치들의 태도는 팀플레이인 야구임에도 팀웍 보다는 개인플레이에 의존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한 처지가 되었다.

허건식 용인대 대학원 객원교수·체육학박사
허건식 용인대 대학원 객원교수·체육학박사

말로만 한·일전이 라이벌이지 경기력의 차이는 컷다. 지금 한국야구에는 야구선수들중에 메이저급 선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국제경쟁력에 못 미치는 현주소를 가지고 있는 것인 한국야구팀이다. 이러한 문제는 학생야구의 교육 뿐만 아니라, 협회의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번 도쿄돔의 아픔을 이겨내고 벼랑끝 한국야구가 다시 희망을 줄 수 있도록 협회와 지도자, 그리고 선수들의 철저한 원인분석과 대안이 나오길 기대한다. 국민들은 승리보다 어떻게 싸웠느냐를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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