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칼럼] 김동우 논설위원

우리나라 정치, 더 나아가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위협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치계 내외부(정치인과 지지자)에서 벌어지는 '양극화(兩極化)'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좀 더 부연하자면, 이 '양극화'에 정치사의 내포(內包)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수식어가 붙은 '정서적 양극화(affective polarization)'가 아닐까? 국내는 물론 서구와 아시아, 동유럽 등 민주주의 정치형태를 택한 국가의 정치계에서 주목받는 정치 갈등 양상 말이다.

정서적 양극화가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 현상이지만, 몇 년 전부터 우리 정치학계에서 초미의 관심을 끌고 있다. 다당제이면서 양당제 형태를 취한 우리 정치가 언제부턴가 정치인이나 지지자들 간에 비이성적인 반목과 대립이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서도 갈수록 첨예화하고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서적 양극화'는 철옹성의 경계를 설정하고 피아(彼我)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당파적 정체성의 발현이다. 자신이 지지하거나 소속한 정치 집단, 정당에 대해서는 애착, 신뢰, 충성심 등 강한 긍정적 정서를 가지지만, 그러하지 않은 정당에 대해서는 불신, 반목, 질시, 분노, 증오, 혐오 등 부정적 정서를 가지는 정치 현상이다. 이분법적 사고와 행동이다.

자신과 긍정적 이해관계가 있거나 내 편 정치 집단에는 그 집단이 무슨 짓을 해도 정의이고 찬성한다. 상대편이 하는 일은 무조건 불의이고 반대한다. 내 편은 무조건 옳고 상대편은 무조건 그르다고 맹신하는 셈이다. 극단의 당파적 적대감이다. '내로남불'의 신조어와 부화뇌동(附和雷同)의 고사성어가 정서적 양극화의 대표적 언표이다.

정서적 양극화의 중요 함의(含意)는 '정서적'이란 표현에 있다. 이는 '사람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 혹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분을 내거나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뜻이다. 중요한 점은 이 정서가 '개별적이 아닌 소속 집단(정당) 구성원들과 공감하는 감정이나 분위기.'에 있다. 공감의 기준이 이성적 사유(합리론)나 경험(경험론)에 따른 감정이 아닌 '무의식'이다. 자신의 정보나 지식이 아닌 소속 집단의 분위기에 편승하거나 무임 승차해 행동을 준비하거나 행동에 옮기는 셈이다. '사유(思惟) 전 행동(行動)'이다. 선험적(先驗的), 자발적인 몸(body)의 움직임이다. 자신도 모르게 행동한 무조건 반사(autonomic reflex)라 할까? 이래서 일부 학자들은 '정서적' 대신 '정동적(精動的)'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정서적 양극화로 인한 상호 갈등과 모순은 변증법적으로 더 바람직한 변화를 이끌어 오히려 정치발전을 한 단계 높일 수도 있다. 정당에 대한 참여도를 높여 경쟁력과 내부 결속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전 세계, 특히 우리나라 정치사 궤적을 추적하면 민주주의 가치를 크게 훼손하고 국민의 정신적 피로도의 극대화를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대립의 차원을 넘어 상대편이 백기 항복해야 결론 나는 적대감이 정서적 양극화의 최대 무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당파적 정체성의 정당성이 크게 떨어짐을 부정할 수 없다. 정치가 이념 차이,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논리로 진창 얼룩져 있다는 점에서다. 횡단과 통약(通約)이 불가능한 진영논리는 정치계에 고정된 방식과 태도인 '아비투스(habitus)'가 돼 좀처럼 정치계가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그 강도가 갈수록 강해져 대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당파적 정체성을 강화해 정서적 양극화를 심화한다. 정치발전과 의식의 성숙을 가로막고 있다.

김동우 논설위원
김동우 논설위원

정서적 양극화는 정치적 배려와 상생을 거부하는 집단적 상징폭력의 하나다. 거부하거나 반대할 수 없는 지경으로 구성원을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정치인들은 물론 지지자들 역시 정치적 게임 규칙을 무시하며 그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다. 상대편을 적으로 여긴다. 언제까지 우리 정치는 정서적 양극화에 발목이 잡혀 정치계를 이전투구의 장으로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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