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연의 음악노트] 정혜연 플루티스트

가정의 달 5월이 되니 그 옛날 어린이날, 가족들과 놀이동산에 갔던 추억이 떠오른다. 전날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잠을 설쳐도 피곤한줄 모르고 눈이 말똥말똥했다. 하늘이 파란 날, 한 손에는 솜사탕을 들고 해맑게 웃으며 넓은 부지를 뛰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특히 이맘때쯤엔 꼭 튤립 축제를 했다. 형형색색 아름다운 꽃들이 이 따뜻한 봄날의 기억을 더욱 반짝이게 만든다. 튤립은 정말 다양한 색이 존재한다. 그 중 병아리처럼 샛노란 튤립이 눈에 띈다. 이 꽃의 꽃말은 희망이다.

우리는 흔히들 음악을 통해 '위로' 받는다고 한다. 왜일까. 음악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준다. 사랑을 노래하고, 슬픔을 말한다. 고뇌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 끝은 희망이다. 우리의 삶에는 아무리 무너지고 실패해도 결국엔 견뎌내는 인간의 본능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음악에도 그 의지가 담겨있다. 사랑과 일에 실패하고, 건강을 잃고, 조국을 잃어도,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그 소망들이 음악 곳곳에 묻어있다. 그 마음은 결코 죽지 않고 음악으로 존재(存在)한다.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는 음악들, 희망을 노래하는 플레이리스트에서 꼭 빠지지 않는 곡이 있다. 바로, 라흐마니노프(S. Rachmaninoff,1873-1943)의 피아노 협주곡 2번(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이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클래식 음악 순위 상위에 늘 올라있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사실 이 유명한 협주곡이 세상에 나오기 전, 그는 깊은 우울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1897년, 야심차게 준비한 그의 첫 번째 교향곡이 대중의 혹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선배 작곡가 큐이(1835-1918)에게 "모세가 이집트에 내린 일곱 재앙 중 하나에 속한다"는 강한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실패의 원인으로는 그 당시 지휘를 맡은 작곡가 글라주노프로 꼽힌다. 그가 충분한 리허설 시간을 갖지 않고 무대에 올라 엉터리 연주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그가 술에 취해 무대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이 처참한 실패로 스물 네 살의 청년이었던 라흐마니노프는 우울증에 빠지며 작곡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이런 그를 도와준 이는 바로 프로이트(1856~1939)의 동료, 니콜라이 달(1860~1939)박사. 라흐마니노프는 모스크바 최면 치료 박사인 니콜라이에게 3개월간 자기암시 요법 치료를 받았다. 니콜라이는 라흐마니노프에게 "당신은 잘 해낼 것이고 새로운 곡을 잘 써낼 것"이라고 계속해서 암시했고 그 결과, 그는 실패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발표하며 다시금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 곡을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헌정했다.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가이기 이전, 뛰어난 피아니스트다. 슬럼프로 작곡을 그만둔 시기에 그는 피아노에 집중했다. 그래서 이런 대곡이 나올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1악장 모데라토(Moderato)는 누구나 한번 들으면 기억하는 인트로다. 이는 크렘린의 종소리라고 불리는데, 모스크바 크렘린 성의 종을 뜻한다. 세상에서 가장 큰 종인 크렘린 종은 아마도 굉장한 저음의 소리를 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 종소리와 같은 피아노 솔로는, 마치 당시 라흐마니노프의 암담한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후 2악장 아다지오 소스테누토(Adagio Sostenuto)는 담담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마음이 느껴지는 악장이다. 필자는 왜인지 2악장을 들으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느린 악장이지만 그리 슬프지도 무겁지도 않고 3악장 알레그로 스케르찬도(Allegro scherzando)를 향해 걸어 나가는 그의 단단한 마음이 느껴진다. 우울증과 고난을 이겨내는 그의 성숙한 마음이 돋보이는 악장이다. 그는 그 고통을 이겨내고 3악장에 환희와 희망의 멜로디를 펼치며 곡을 끝낸다.

정혜연 플루티스트
정혜연 플루티스트

이 곡을 들으니 나의 지난 시간이 떠오른다. 필자는 대학교 입학 실기시험을 한 달 앞두고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온 몸이 부서지고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오가는 길에 놓였으나 다행히도 잘 회복하여 다시 악기를 잡았고, 그렇게 삼수를 해서 대학에 갔다. 처음에는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나' 하늘을 원망하며, 본인 역시 슬럼프에 빠졌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음악을 하기 위해 힘든 재활을 견디고 마음을 다잡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같이 힘든 시간을 이겨냈기에 더욱 단단해졌고 지금의 내가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라흐마니노프 역시 교향곡 1번의 실패를 겪고 좌절했지만, 결국 그 고통을 이겨냈기에 지금 전세계인의 위로가 되는 명곡을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다보면 언젠간 열매를 맺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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