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지기' 구순의 여인들… 동네쉼터서 매일 만나 일상 공유

모일의 봄날은 화사하다. 기성(71) 씨는 오늘도 마을 입구에 있는 작은 쉼터를 들여다본다. 그곳에는 기성씨 어머니를 비롯해 이른바 '9학년'이 되신 황혼의 여인 세 분이 앉아있다. 이러궁저러궁 옛이야기가 나지막이 흘러나온다. 얘기 끝에 약간 실랑이가 벌어졌다. "옛날에 우리 새댁 때는 명주베도 짜고 그랬잖여." "자네가 뭔 베를 짰나, 자네 시어머니가 다했지 뭐…." "아녀!" "아니긴 뭐가 아녀!"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걸까. 홍승순(96), 양순희(95), 하상길(91) 할머니는 이 동네, 모일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한마을에 살고 있다. 서로 걱정해주기도 하고 토닥거리기도 한 세월이 70년도 넘었다. 지금은 쉼터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모두 나이 구십을 넘겼다. 이들의 인연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들에게 오늘의 봄날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모일(慕逸)은 수락리 한쪽 구석에 있는 마을이다. 작은 산 밑에 열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 속에서 스물댓 명이 형제간처럼 지낸다. 그중 구십을 넘긴 분이 여섯 명인데 대부분 자손들이 모시거나 보살피고 있다. 7학년 기성씨는 이곳에서 아직 젊은이다. 이웃마을에 집을 얻어놓고 수시로 어머니를 살피러 모일에 온다. 마을에선 어르신들을 위해 조그만 컨테이너로 쉼터를 만들었다. 가끔 마을 부녀회장 금옥씨가 쉼터에 들르면 황혼의 여인들은 동네 소식을 물어보기 바쁘다. "저 건너 명자엄마는 어떻댜?" "많이 아프다가 지금은 괜찮대유." "누구는 그여 딸네집으로 갔대유." "그렇구먼." "아이구, 얼른 죽어야 할 텐데…." "무슨 말씀이래유." 마무리는 죽는 얘기로 끝이 난다.

제일 연장자인 홍승순 할머니는 손수레를 잡고 혼자 힘으로 쉼터에 출근하기도 했다. 요즘엔 넘어질까 걱정돼 같이 사는 막내며느리가 낮에 태워다주고 저녁에 모셔간다. 며느리의 극진한 정성이 소문나서 효부상을 타기도 했다. 어머니의 안위를 걱정하는 아들 옥균씨와 며느리는 늘 노심초사한다. 할머니는 이제는 뭐든지 힘들다고 하면서도 말씀을 시원시원하게 잘하신다. 옛날 어려운 시절에 큰아들이 당시 명문인 청주중학교에 입학해서 좋기도 했지만 뒷바라지하느라 힘들었단다. 좋아하는 노래를 물으니 한참만에야 운을 뗀다. "정든 님이 오셨는데 인사를 못해~~" 이가 빠져 부끄럽다면서도 노래하는 얼굴엔 연분홍이 꽃핀다.

텃밭을 말끔하게 관리하는 양순희씨
텃밭을 말끔하게 관리하는 양순희씨

양순희 할머니는 씩씩하다. 텃밭에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게 농작물을 키우고 있을 만큼 부지런하고 기운차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고자 하는 일은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봄내 밭일을 많이 해서 손바닥이 꺼칠하다. 아직도 직접 김치를 담가 자손들에게 주기 바쁘다. 아들, 딸이 교수, 변호사가 되었다고 자랑하실 땐 목소리에 푸르름이 묻어난다. 젊을 때는 노래책 보고 연습하기도 했다며 슬며시 아리랑 노래를 흥얼거린다. 건강하다 하면서도 연세가 연세인지라 기성씨는 늘 어머니를 살핀다.

이야기하다 수줍어하는 하상길씨
이야기하다 수줍어하는 하상길씨

하상길 할머니는 아직도 소녀처럼 수줍다. 웃을 때마다 손으로 입을 가린다. 6.25전쟁이 터졌을 때 모일로 시집왔다. 28세에 혼자되어 시부모 봉양하며 2남 1녀를 잘 키웠다. 앉으나 서나 자손들의 건강을 기원한다. 예전 청원축제장에서 장한 어머니상을 받기도 했다. 소원이 그저 잘 죽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란다. 젊었을 때엔 노래는 못해도 신나게 놀기는 했다며 보랏빛 미소를 손으로 살짝 가린다. 아들 진희씨가 슬며시 쉼터를 들여다보고 지나간다.

쉼터에 들른 부녀회장과 동네 소식을 주고받는 어르신들(왼쪽부터 부녀회장 지금옥, 정기성, 양순희, 홍승순, 하상길)
쉼터에 들른 부녀회장과 동네 소식을 주고받는 어르신들(왼쪽부터 부녀회장 지금옥, 정기성, 양순희, 홍승순, 하상길)

쉼터 옆 밭에는 얼마 전에 심어진 고추모가 보인다. 이제 막 땅내를 맡은 듯 조금씩 등을 펴고 있다. 밭고랑 사이를 넘나들며 옥균 씨와 진희 씨가 비료를 준다. 생명을 보살피는 손놀림이 쉼터에 있는 어머니를 모시듯 정성스럽다.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싱그럽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작은 산과 들에는 5월의 신록이 빼곡하다. 쉼터 밖은 두런두런 생명을 키우는 소리가 왕성한데, 쉼터 안은 구순 여인들의 노을로 가득하다. 빛과 그림자처럼 함께 있다.

김애중 청주시 기록활동가
김애중 청주시 기록활동가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모일의 황혼에서 내 어머니의 노래가 흐른다. 내 모습도 희미하게 어른거린다. 흐르는 강물처럼 모일의 봄날이, 그녀들의 봄날이 천천히 흐른다. 봄날이 간다. <끝> / 김애중 청주시 기록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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