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산책] 유인재 국가철도공단 상임감사·음악평론가

"1984년 4월, 맑고 쌀쌀한 날이었다. 괘종시계가 13시를 알렸다." 1948년 '빅 브라더(Big brother)'가 통제하는 암울한 미래 사회를 그린,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첫 문장이다. 『1984』가 현재 시점으로 다시 쓰여진다면 '2022년 12월 1일 맑고 쌀쌀한 날씨였다. 전자시계가 13시를 알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2045』이 탄생했을 것이다. '빅 브라더'가 아닌 인공지능이 인간을 통제하는 세계이다. 2022년 12월 1일은 현재 우리 삶의 방식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 서비스인 '챗 GPT'가 출시된 날이고, 2045년은 미래학자 커즈와일이 그의 책『특이점이 온다』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앞서리라 예측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예상보다 일찍 찾아온 인공지능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학자와 전문가들도 있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영화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로 인한 연상 효과일 수도 있지만, 이해되지 않거나 통제되지 않는 것에 대한 인간 본연의 두려움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만큼 이해도 통제도 어려운 존재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공지능은 현재까지 인간이 이루어 놓은 지식과 기술에 대한 통계적인 학습을 통해 성장한다. 우리 인간과 닮은 '데칼코마니(d?calcomanie)'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가장 두려운 순간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순간이다. 스스로 상상하는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시점이다. 인간을 자신의 적으로 생각하는 순간이다.

이러한 인공지능 시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공지능과 맞서야 한다. 그것은 상상력과 감성이다. 다니엘 S. 밀로는 『미래중독자』에서 5만 8천 년 전경 최초의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 현재의 세계를 만든 것은 지평선 너머에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상상력 덕분이라고 말했다.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가 말한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가정하고 믿는 능력이다. 상상력은 혁신과 혁명으로 나타난다.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관행을 거부하는 것이다. 최근, 이세돌 9단을 이긴 알파고는 아마추어 바둑 선수에게 거의 전패하였다. 인공지능이 학습하였던 것과 다른 형식의 바둑을 두었기 때문이다. 한편, 영화 <매트릭스>에서 인간이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기계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남녀 주인공의 자신을 버리는 이타적 사랑이었다. 이성과 지식의 결정체인 인공지능이 상상할 수 없었던 타자에 대한 연민과 공감, 휴머니즘이었다. 인간만이 지닌 감성이었다.

클래식 음악 중에서도 언제나 한계를 벗어나는 상상과 낯선 감성의 세계로 이끄는 곡들이 있다. 슈베르트는 4악장으로 완성되는 전통적인 교향곡 형식에서 벗어나 두 악장만으로 교향곡 8번을 작곡하였다. 미완성으로 완성을 초월하는 경지를 보여주었다. 최근 슈베르트의 모든 음악을 학습한 인공지능이 미완의 악장을 완성하였지만, 평론가와 감상자들로부터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였다. 인간 내면의 은밀하고 변화막측한 감성을 인공지능이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편, 베토벤은 당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였던 방식으로 쉴러의 시 '환희의 송가'와 음악을 접목하여 교향곡 9번 <합창>을 완성하였다. 형식상 금기시 되었던 성악을 교향곡 안으로 가져와서 음악과 언어가 하나로 통합된 휴머니즘의 총화와 같은 불후의 걸작을 만들어낸 것이다. 또한 차이콥스키는 교향곡 6번에서 느린 3악장과 빠른 4악장이라는 작곡 관행에서 벗어나 악장의 순서를 단순하게 도치시킴으로써(빠른 3악장, 느린 4악장) 비극(悲劇)의 끝에서 한 발짝 더 나간 비창(悲愴)의 경지를 우리에게 활짝 열어 보일 수 있었다. 현대 음악가 존 케이지는 피아노 연주자가 4분 33초 동안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고 침묵하는 <4분 33초>를 작곡하였다. 감상자가 작은 소음과 텅빈 침묵 속에서 음악을 찾게 한다. 작곡하지 '않음'으로 작곡하고, 연주하지 '않음'으로 연주한 것이다.

유인재 국가철도공단 상임감사·음악평론가
유인재 국가철도공단 상임감사·음악평론가

아인슈타인은 자신은 물리학자라기보다는 한계가 없는 상상력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예술가라고 하였고, 맥스 테그마크는『Life 3.0-인공지능이 열어갈 인류와 생명의 미래』에서 미래에는 지능보다는 인공지능이 대체 불가능한 감성을 갖춘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인공지능 시대에서 살아남으려면 인공지능이 상상하지 못하는 것을 상상하고 느낄 수 없는 감성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작은 시작은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과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완성해 보는 것이다. 차이콥스키 6번 교향곡을 들으며 비통한 마음의 끝까지 가보고, 베토벤 9번 교향곡을 들으며 휴머니즘의 절정에 도달해 보는 것이다. 이것이 비인간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다운 삶의 형식이자 생존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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