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만세운동 활동 증거 모아 제출해도 유공 불인정

편집자

국권을 회복한지 78년이 지났다. 살아있는 독립투사들은 단 한명도 없다.

독립유공을 찾아주고자 하는 이유는 조상의 명예를 찾아 주기 위함이다. 지원금을 받기 위함이 아니다. 하지만 서훈을 받기 위해선 후손들이 조상의 공적을 직접 입증해야 한다. 100여 년이 넘는 자료들은 소실되거나 곳곳에 숨어있어 찾아내기 만무하다.

국가보훈부 서훈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당시 판결문·사진·신문 등 공증된 자료 혹은 당시 사람들의 보증(인보증)이 필요하다. 일본의 눈을 피해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현장에서 사살되거나 이름을 바꿔 활동했기 때문에 그 공적을 인정받기 어렵다.


[중부매일 이재규 기자] 국권을 회복한지 78년이 지났지만 독립 유공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2명의 독립투사가 있다.
 

김인태

김인태 선생의 어릴적 모습. 좌측부터 김인태, 왕치득, 오택 / 후손 김영인씨 제공
김인태 선생의 어릴적 모습. 좌측부터 김인태, 왕치득, 오택 / 후손 김영인씨 제공

김인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의열단, 구세단에서 활동하고 파리강화회의, 3·1운동을 준비하며 독립에 앞장섰다.

1914년 고등학생 때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박재혁과 친동생 김병태, 오택 등 16명과 함께 구세단을 결성했다.

구세단은 경남 청년들을 모아 독립사상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으며 다른 지역까지 많은 이들과 교류했다. 하지만 반년도 가지 못해 검거됐고 구세단은 해체됐다.

중국 유학 후 돌아온 김인태 선생은 1919년 2월, 3·1운동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부산에서 오택, 일본에서 최천택을 만나 만세운동을 모의했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김인태가 서명한 통신전 8·9·10호 내용 / 후손 김영인씨 제공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김인태가 서명한 통신전 8·9·10호 내용 / 후손 김영인씨 제공

같은 해 4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던 파리에서 의열단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 땐 김탕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파리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의 밀명을 받고 일본인 관료를 처단하려 했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대표 김규식의 만료로 이 일은 실패했다.

이후 김규식 등과 당시 한국에서 자행되는 일본 행위를 고발하고 이에 항거하는 한국의 상황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통신전'을 8차례 제작하고 배포했다. 이어 8월부턴 김규식과 미국으로 건너가 구미위원부로 활동했다.

의열단원들 사진. 앞 단장 김원봉, 좌즉부터 오택, 왕치덕, 김인태 / 후손 김영인씨 제공
의열단원들 사진. 앞 단장 김원봉, 좌즉부터 오택, 왕치덕, 김인태 / 후손 김영인씨 제공

1934년 친동생이자 의열단원인 김병태와 중국에 거주하며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하지만 1년 후 상하이 부두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현지에 구금됐다가 국내로 송환된다.

그는 결국 광복이 되자 김원봉, 오택 등과 사진을 찍으며 독립 운동에 종점을 찍는다.

이러한 업적을 이어온 김인태 선생은 아직 독립유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조카 김영인 씨는 과거 사료와 신문 등을 통해 김인태 선생의 활동 내용을 찾아냈다.

1935년 4월 24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상해 의렬단 수뇌부 관계자 김인태는 지난 오일 상해령경의 손에 체포돼…', 동아일보도 하루 전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이뿐 아니라 김인태 선생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만든 통신전 8·9·10호에 남긴 서명, 의열단장 김원봉과 찍은 사진, 의열단원인 친동생 김병태와 같이 활동한 국가유공자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관련 서적 등 유공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자료를 충분히 제출했으나 3년째 거절당하고 있다. 거절 사유는 '증거불충분'이다.
 

박기범

1919년 4월 1일 충북 음성군 한내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여구현 옹의 확인서. 오른쪽 사진은 당시 증언을 받으러 갔던 박성환 선생과 여구현 옹의 모습. / 후손 박성환씨 제공
1919년 4월 1일 충북 음성군 한내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여구현 옹의 확인서. 오른쪽 사진은 당시 증언을 받으러 갔던 박성환 선생과 여구현 옹의 모습. / 후손 박성환씨 제공

충북 음성에서 목이 터져라 만세운동을 하던 청년은 싸늘한 주검이 됐다. 누군지도도 모른체 쌓여있는 시체들 사이에서 어머니는 아들을 찾아 꺼내야 했다.

박기범 선생은 1919년 4월 1일 음성군 소이면 한내장터 만세운동의 가장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인물이다. 앞서 3·1운동이 일어나면서 음성군도 독립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박기범 선생과 1천여 명의 군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면사무소에서 강력하게 독립을 외쳤다.

만세운동이 점점 거세지자 일본 경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주모자 9명을 연행했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거세진 군민들은 주재소의 창문을 깨는 등 강력히 항의했다.

일본 경찰은 무차별적으로 총을 쐈는데 이 때 박기범 선생 등 군민 12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손자 박성환 씨는 1997년 조부의 독립활동을 인정받고자 가장 먼저 같이 독립 운동을 한 여구현 옹을 찾았다.

여구현 옹은 '당시 16세의 나이로 만세운동에 참여해 김명문씨 집 대문 앞에서 박기범 씨는 왜병의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고 … ' 라는 내용을 증언, 확인서를 써줬다.

이어 1979년 음성군 독립운동 추모비를 건립하기 위한 조사에서 면내 기관장과 이장, 노인회장 등 당시 인물들의 증언으로 박기범 선생이 독립운동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한내장터의 추모비에도 박기범 선생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1987년 발간된 '내고장 소이' / 후손 박성환씨 제공
 1987년 발간된 '내고장 소이' / 후손 박성환씨 제공
 1987년 발간된 '내고장 소이' 31쪽 피살자 명단에 박낙범이라는 이름이 기재 돼있다. / 후손 박성환씨 제공
 1987년 발간된 '내고장 소이' 31쪽 피살자 명단에 박낙범이라는 이름이 기재 돼있다. / 후손 박성환씨 제공

1987년 발간된 '내고장 소이'에서도 만세운동 피살자 명단에서 박 선생의 이름이 확인된다. 이 책엔 박낙범이라는 이름으로 써져있다.

이러한 증거 자료를 들고 직접 보훈부를 찾아간 손자 박성환씨는 믿을 수 없는 답변을 듣게 된다.

당시 국가보훈부에선 "우리가 이 한사람(여구현 옹)을 어떻게 믿느냐. 90세가 넘어 정신이 온전한지 어떻게 아는가"라는 답변과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말만 돌아왔다.

음성군 독립운동 추모비 실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이자 당시 면장인 류상필씨의 확인서. / 후손 박성환씨 제공
음성군 독립운동 추모비 실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이자 당시 면장인 류상필씨의 확인서. / 후손 박성환씨 제공
정상헌 음성군수의 사실확인서. / 후손 박성환씨 제공
정상헌 음성군수의 사실확인서. / 후손 박성환씨 제공
정상헌 음성군수의 사실확인서. / 후손 박성환씨 제공
정상헌 음성군수의 사실확인서. / 후손 박성환씨 제공

박성환 씨가 할아버지의 증거를 제출하고 답변 받는 과정만 20여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후손들은 번번이 증거자료를 제출할 때마다 A4용지 한 장 분량에 적혀있는 '증거불충분'을 보면서 다시 이 과정을 반복한다. 이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도 생긴다.

보훈부에선 구체적으로 어떤 증거 자료를 제출해야하는지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두 독립 투사들의 후손들은 공통으로 "후손들이 자료를 이 정도로 준비했으면 정부에서 이후 자료 발굴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며 "이게 나라를 지킨 조상들의 현실"이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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