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전쟁 속 궂은일 해가며 살 길 찾았던 참혹했던 삶

편집자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후손들은 선조들의 가난을 이어받아 어렵게 생활했다. 신문팔이, 구두닦이, 각종 기관에서 잡일을 하는 등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이런 가운데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 평탄하지 않게 살아온 서상국·김원진 전 광복회 충북지부장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지난 8일 진행된 인터뷰에서 서상국·김원진 전 광복회 충북지부장이 담소를 나누며 웃고있다. 왼쪽부터 서상국, 김원진 옹. / 이재규 
지난 8일 진행된 인터뷰에서 서상국·김원진 전 광복회 충북지부장이 담소를 나누며 웃고있다. 왼쪽부터 서상국, 김원진 옹. / 이재규 

서상국

서상국 전 광복회 충북지부장은 독립운동가인 서대순 선생의 아들이다.

서대순 선생은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의 자유민보, 혁신공보 등을 배포했다. 이후 김상옥 열사와 암살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의 나이 52세때 서상국씨가 태어났다. 서울에 살던 서씨는 6·25전쟁이 벌어져 청주 우암동으로 피난을 온다.

어머니는 서씨를 키우기 위해 행상을 했다. 당시 사기 공장에서 나오는 폐품을 청주·진천·보은장 등 여러 장을 돌아다니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갔다.

중학교 졸업한 서 씨는 형편이 어려워 청주상고 야간반에 진학한다.

낮 시간엔 주로 도청 안의 청주 경찰국(현 충북경찰청)에서 사환을 도맡았다. 고등학교 졸업을 하자 어머님은 60대가 됐고 장사를 할 수 없을 만큼 연로해졌다. 대학 진학은 가난해 꿈도 꾸지 못했다.

대학과 월급을 동시에 해결할 방법을 찾던 서씨는 군대에 입대하기로 마음먹는다. 당시 3대 독자로 군대 면제대상이었으나 장교로 입대했다.

소위로 임관한 서씨는 얼마 후 벌어진 베트남 전쟁에 지원해 참전한다.

베트남에선 주로 퀴논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맹호 16호 작전'에 투입돼 야간에 몰래 침투하던 월맹군 장교와 병사 2명을 죽이기도 했다. 당시 옆 소대에선 동기생 2명과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그의 끔찍한 기억이 됐다.

1971년 복귀한 서씨는 6사단 중대장, 15사단 대대장, 국방대학원 근무대장 등을 역임한 후 1990년 1월 전역한다.

서상국 전 지부장과 어머니가 서대순 선생의 독립유공자 포상식때 찍은 기념사진 / 서상국씨 제공
서상국 전 지부장과 어머니가 서대순 선생의 독립유공자 포상식때 찍은 기념사진 / 서상국씨 제공

중령으로 예편한 서 씨는 이후 국무총리산하 비상기획위원회에서 근무하다 은퇴했다. 이후 보은군 내북면으로 돌아가 18년째 농사를 지으며 어릴 적 해보고 싶었던 기타를 치고 있다. 그는 가끔 말티재에서 버스킹도 하며 남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

 

 

김원진

김원진 전 광복회 충북지부장은 1937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김창도 애국지사는 3·1운동에 참여한 후 신흥무관학교 8기 교육생으로 입학해 홍범도 장군의 휘하에서 봉오동 전투,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1927년엔 남만주의 동명학교에서 민족교육에 힘쓰다 길림지방의 중고등학교 교원으로 교육을 하기도 했다.

김 씨는 독립운동가 아버지와 만주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독립군의 중요한 문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9세 때 조선 땅 남양으로 심부름을 갔을 당시에는 독립군 때문에 행인들의 몸수색을 하던 시절이었다. 어린아이는 몸수색을 하지 않아 옷가지에 편지 등을 숨겨 전달하는 일이 잦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간 그는 독립투사를 만나 새로운 옷과 운동화, 만두 몇 개를 받아들고 다시 만주로 향했다. 돌아오니 아버지는 이 옷을 들고 독립운동을 하러 떠났다.

여러 심부름을 할 때마다 감자 갯수와 보따리의 색깔이 달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이 일종의 신호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러한 생활 중 만주에 콜레라가 퍼지면서 어머니와 누나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해방 후 신흥무관학교 동지들과 먼저 한국으로 돌아갔다.

김씨도 9살 여동생과 한국에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함경북도 회령, 연천, 동두천 등을 거쳐 약 3주 만에 서울에 도착한다. 군인인 아버지와 떨어져 생활할 수 밖에 없어 장충동 피난민수용소에서 생활을 이어갔다. 수용소에선 하루 두 끼를 주는데 강냉이 죽, 물 죽만을 끼니로 때워야 했다. 여동생을 돌봐야 했던 김 씨는 끼니를 이어가기 위해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을 하며 생긴 돈으로 마른 국수를 사 배를 채웠다.

아버지 김창도 중령과 김원진 전 지부장이 제주도에서 찍은 사진 / 김원진씨 제공
아버지 김창도 중령과 김원진 전 지부장이 제주도에서 찍은 사진 / 김원진씨 제공

이듬해 아버지는 육군사관학교 특별반을 졸업해 전주의 2연대로 발령났다. 아버지와 함께 남원, 대전, 청주 등을 거쳐 온양으로 거처를 옮겼다. 형편이 어려웠던 김씨는 여동생과 여관에서 잡일을 하면서 지냈다.

다음 해에 6·25전쟁이 발발하며 아버지는 포천으로, 남매는 온양에 남는다. 이때 미군 폭격기가 이곳을 폭격해 심장병을 앓게 된다.

1년 후 아버지에게서 제주도 훈련소에 있다는 소식이 와 여동생과 제주도로 떠났다.

제주도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극장에서 잡일을 하던 김 씨는 아버지의 증평 37사단으로 발령으로 또다시 거처를 옮긴다. 아버지가 전역하고 김 씨 가족은 청주 우암동으로 이사오게 된다.

김 씨는 급하게 거처를 옮기느라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가족들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고민을 하던 그는 친구들과 청주시내에서 볼펜장사를 시작했다. 이후엔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다 내려와 재작년까지 청주 가덕면에서 농사를 지었다.

김원진, 서상국 지부장은 재임시절인 2013년, 청주시 상당구 삼일공원에 항일운동 기념탑을 세웠다. 민족대표 33인 중 6명이 충북출신이지만 그때까지 이분들을 모시는 기념탑이 없었다고 한다. 또 현재 청남대에 임시정부 요인 8명의 동상이 세워졌는데 두 지부장 재임시절에 계획한 것이다.

두 지부장은 "해방이 되면서 친일 청산을 제대로 못했다. 미군정 3년 동안 미국 군인들이 한국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고 관료를 뽑아야 하니 친일파를 많이 고용했다. 이들의 뿌리를 뽑아버려야 한다"며 "우리 근대사의 역사는 불행하다. 30여년간 일본 식민하에 정말 모든걸 다 뺏겼다. 불행한 역사를 절대 잊어선 안된다. 한일관계가 많이 좋아져 경제적으로 협력하는 것은 좋으나 일본의 진솔한 사과를 받는 것이 우선이다"고 전했다.  / 중부매일 이재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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