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이건 완전 소송사기입니다! 다 짜고한 거에요!" 머리가 희끗한 변호사의 격앙된 목소리가 법정의 정숙을 깼다. 다음 재판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주의가 갑자기 집중되어 순간 정적이 흘렀다. 법대위의 판사도 약간 당황한 듯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1심에서 패소한 피고 측을 대리하고 있는 항소심 변호사였다. 1심에서 사실 인정 부실했다며 강하게 성토하고 있었다. 성난 목소리에 짐짓 과장된 태도가 합쳐서 마치 연극배우처럼 보였다. 그의 주장은 항소장과 기존의 준비서면에 모두 기재하여 제출되어 있을 터였다. 굳이 변론에 감정을 담아 법정을 어수선하게 만들 이유는 없었다.

간혹 1심에서 패소했거나 강성 의뢰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는 변호사들은 항소심에서 짐짓 오버액션하기도 한다. 그런 분들은 자신의 무리수를 열정이나 프로 근성같은 말로 포장하고 싶겠지만 이는 변호사의 자기방어의 한 모습일 뿐이다.

재판정 에어컨 찬바람을 이기는 한여름 K-무더위에 정신줄을 놓은 걸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점점 화를 끌어올리더니 상대방 변호사에게 무언가를 대답하라며 고성으로 다그쳤다. 여기서부터 그는 선을 넘었다.

재판은 두 당사자가 직접 싸우는 구조가 아니다. 당사자들은 상대방이 아니라 판사에게 사실을 말하고 판사는 양 쪽의 이야기를 듣고 시비를 가린다. 이와 같은 간접적 분쟁해결구조는 본질이 싸움판인 재판이 품격을 잃은 막말잔치가 되지 않도록 방지한다.

상대방의 설명을 요구할 때도 법원을 통해야 한다. 상대의 설명을 듣고 싶은 당사자는 상대방에게 물어봐 달라는 취지로 법원에 '구(求)'석명 신청을 하고, 법원이 신청 내용을 듣고 재판진행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상대방에게 석명을 요구한다, 석명 요구받은 당사자는 이를 요청한 상대방에게 직접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법원에 설명한다. 석명요구에 답을 하지 않으면 그 불이익은 석명을 요구받은 상대방에게 귀속한다.

변호사들은 이런 룰을 지키며 변론하도록 훈련받아왔다. 감정앙금이 있는 당사자의 말에서 감정을 걷어내고 냉정하게 증거로 법원을 설득하면 될 일이니 변호사끼리 재판 중에 고성을 주고받을 일은 없다. 재판정에서 상대방 변호사를 비난하며 직접 다그치는 것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일이다.

그는 삿대질하듯 상대 변호사에게 서류뭉치를 거칠게 흔들었다. 서류 몇 장이 빠져 허공에 흩어졌다. 떨어진 서류를 챙기느라 숙였던 머리를 들자 광기어린 음악가의 초상 같은 얼굴이 드러났다. 충혈된 눈에 헝클어져 앞으로 쏠린 머리카락이 그의 현 상태를 잘 설명하고 있었다.

그의 변론을 보면서 동종업계 일원으로 창피하기도 하였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소송에 문외한인 방청객들 시각에서 통쾌해 보일 수도 있는 그의 변론을 보고 '나에게 저렇게 변론을 해 달라'고 하면 어쩌나… 전례가 누적되서 무절제한 변론이 주류가 되면 어쩌나…

분노에 찬 변론을 한 변호사는 서울 유명 중견로펌 소속의 나이 지긋한 변호사였다. 봉변을 당하고 있는 변호사는 인천의 한 개인 변호사 사무실에 고용된 젊은 여자 변호사였다. 어쩌면 그 체급의 차이가 선넘은 핍박을 하고 있는 변호사의 모습을 더 고약해 보이게 만들었다.

젊은 여자 변호사는 느닷없는 봉변에도 비교적 의연하게 잘 대처했다. '소리 낮추세요.'라고 자제를 요청했다. 판사도 그제서야 '목소리를 낮추라'는 주문을 했다, 그는 판사의 요구에 방청석을 힐끗 쳐다보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얼굴에는 창피함을 찾아 볼 수 없고 오히려 신참에게 '참교육을 시전'했다는 약간의 의기양양함이 보였다. 속으로 생각했다. '저 변호사 정신 못차렸구만.'

분기탱천 변호사의 약육강식 변론을 보고 있자니 몇 해 전 빌런 변호사와 맞붙었던 재판이 떠올랐다. 조정기일이었다. 나의 의뢰인은 폭력성향이 있는 상대방과 마주하기 싫어 나를 선임했다. 조정일 전 협의를 통해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나만 조정법정에 출석했다.

우리 측은 변호사만 조정에 참석했다고 하자 상대방 변호사가 "당사자 출석 안시키고 예의가 없어!"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새파랗게 어린 변호사의 느닷없는 급발진에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했다. 무지의 소산인지 나름의 소송전략인지 몰라도 예의가 없는 것은 그쪽이었다.

재판에서 변호사가 선임된 경우 당사자가 변호사와 함께 직접 출석하는 것이 더 이례적인 일이다. 법과 관행을 무시한 어처구니없는 도발이었다. 그는 눈을 반쯤 뒤집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흥분하고 있었다. 가느다란 몸에 짐짓 독기있는 표정으로 나를 위협하려 하는 모습이 오히려 측은했다.

거리에서 이런 일을 겪었다면 그의 분노조절장애에 적절한 물리력을 동반한 치료(?)를 해 줬을 터였다. 하지만 그가 발작한 곳은 법정이었고 내게는 보호해야 할 의뢰인이 있었다. 그의 발작 치료를 다음으로 미뤘다. 실성한 상대에게 굳이 변호사의 권한과 업무에 관한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솔직히 말도 섞기 싫었다. 조정위원의 허가를 얻어 의뢰인과 통화하여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의뢰인은 내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다.

조정위원에게 조정거부 의사를 밝혔다. 조정위원도 나를 설득하지 않았다. 조정은 결렬되었다. 그는 본인의 감정조절 실패로 재판을 망쳤다는 것을 깨닫자 말은 거칠되 눈빛은 간절해지는 특이점을 보였다. 그의 독특한 위협(혹은 호소?)을 뒤로하고 쿨하게 법정을 나왔다. 굳이 상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즉시 그 변호사가 소속된 기관의 장에게 연락하여 상황을 알리고 적절한 조치를 요구했다. 그가 얼마 후 다른 곳으로 전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권택인 변호사
권택인 변호사

재판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 치열하게 싸우다 승부가 나면 이에 승복하고 선수끼리 감정을 남기지 않는 복싱경기 같아야 한다. 변호사들이 자존심을 버리고 길거리 불량배들의 마구잡이 싸움같은 변론을 하거나, 증오의 칼을 들고 거리를 헤매는 재판을 해서야 되겠는가?

최근 의뢰인과 이야기를 엿듣는 스파이형 변호사, 우리 당사자에게 접근하는 이간질형 변호사, 사실이나 법리를 제쳐두고 몹쓸 말싸움에만 몰두하는 깐족형 변호사도 경험했다. 유명 여배우의 말이 생각난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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