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김종수 건국대학교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충북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에는 높은 지대 위에 7층 석탑 1기가 우뚝 서 있다. 공식 명칭은 충주 탑평리 칠층 석탑이나, 통칭'중앙탑'이라고 부른다. 이 탑은 높이가 12.65m로 현존하는 신라시대 최대의 탑이며, 유일한 7층 석탑이다. 탑에 관한 명문 기록이 없어 언제, 무슨 이유로 탑이 조영되었는지 알 수 없다. 신라시대 중원경으로 불린 국토의 한복판에 이런 큰 석탑을 세웠을 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 중앙탑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신라 원성왕 12년(796년), 어느 날 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국토의 정중앙이 어디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보폭과 걸음 속도가 비슷한 신하 2명을 불러 임무를 주었는데, 그것은 각각 남과 북의 맨 끝 지점에서 같은 시각에 출발하여 서로 만나는 곳을 표시하도록 한 것이다. 왕은 두 사람이 만나는 지점이 자신이 다스리는 신라 국토의 정중앙일 것으로 생각했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같은 장소에서 만났고, 조정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그곳에 탑을 조성하였다. 그것이 현재의 충주 중앙탑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우화 같은 이야기이지만, 그만큼 충주의 지리적 입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중앙탑은 2단의 기단 위에 7층 탑신을 형성하고 그 정상에 상륜부를 구성한 탑이다. 특히, 지표면에 둔덕을 조성하고 그 위에 탑을 축조한 경우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1990년대 초 탑의 북쪽 지역을 발굴조사 하여 건물지의 흔적으로 보이는 적심, 담장 등과 삼국~통일신라 시대의 기와와 토기 등 유물을 발견하였으나, 건물지가 절터의 가람(伽藍)과는 성격이 맞지 않는다고 보아 절터와 관련 없는 건물로 추정하였다. 그럼, 탑은 있는데 사찰을 짓지 않았다는 것이니 불탑이 아니라는 말이다.

중앙탑이 문헌자료에 나오지 않는 것은 사찰이 없는 단독 탑이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보통 탑이 소재한 곳에는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탑의 건립 시기에 사찰이 없었다면 중앙탑의 조성 목적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 된다. 누가, 왜 국토의 중앙에 높게 둔덕을 쌓고 7층의 석탑을 세웠을까?

중앙탑의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통일 직후 신문왕 대, 8세기 원성왕 대, 9세기 문성왕 대, 후삼국 초기 등의 여러 설이 있다. 어느 설이든지 간에 물산이 풍부하고 군사적 요충지이며 국토의 중앙인 중원에 7층의 수직상승 기운을 표현한 석탑을 세웠다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구전 설화와 같이 원성왕 대에 신라의 천하관(天下觀)에 입각한 왕권 강화와 민심 수습을 위하여 세운 호국 기념탑이었을까?

만약, 탑의 건립 시기가 8세기 후반 원성왕 대(785~798)라면, 원성왕은 시호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 하대의 실질적인 개창 군주로서 왕통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국토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여 민심을 수습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본래 왕이 될 첫 순위가 아니었는데 지모가 출중하여 사전 기획과 공작을 통해 왕이 된 인물이다. 원성왕의 즉위 과정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자세한 이야기가 전하는데, 경주 알천의 물이 큰비로 인해 넘쳐 왕위 후보자인 김주원이 궁으로 오지 못하자 그 틈을 타서 궁으로 들어가 신료들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원성왕 김경신이 사전에 짜놓은 각본이고 알천의 범람 운운하며 이를 하늘의 뜻으로 연결하여 내러티브를 구성한 것은 후대의 상징조작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종수 건국대학교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김종수 건국대학교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이처럼 원성왕은 비정상적 방법으로 왕이 되었으므로 왕통의 변화에 따른 왕권 강화와 민심 수습이 시급한 현안이었을 것이다. 10여 년의 시간이 지나 왕권이 안정기에 접어들자 원성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국토의 정중앙에 백성들의 마음을 한데 모을 퍼포먼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중원 땅에 하늘을 향해 치솟는 웅혼한 기상의 기념탑을 조영한 것이 아니었을까? 2018년 발굴조사 결과 탑이 위치한 탑평리 일대는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점령했던 지역으로 삼국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원성왕은 과거 삼국의 각축장이며 요충지인 중원을 탑을 세우기에 안성맞춤의 입지로 여겼을 것이다.

국토의 정중앙 중원에 세워진 중앙탑은 역사의 변천을 지켜보면서 오늘날에도 우리 국토의 옴파로스(omphalos)로서 웅혼한 기상을 뽐내고 있다. 내가 대한민국의 랜드마크라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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