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실존주의가 풍미하던 시절에 싸르트르나 까뮈는 세상을 부조리로 인식했다. 싸르트르의 앙가쥬망 즉 참여나 까뮈의 저항은 그렇게 인식된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방식이었다. 의식의 흐름을 도입해 프루스트와 더불어 현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제임스 조이스가 진단한 세계 인식이 마비라는 말로 해석될 수도 있음을 어느 책에선가 읽었다. 조이스가 살던 아일랜드나 유럽이 섬세한 감수성의 그에게 인간을 마비시키는 시스템, 제도, 문명 등으로 인지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당시가 세계를 질곡으로 몰고간 일차 세계 대전 상황이며 그 처참 속에서의 인간 관계, 제도 및 시스템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러하리라 짐작할 수 있다.

마비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의 여류 시인인 사포의 싯귀에도 있다. 사랑은 마비다. 사포의 싯귀인 그것은 조이스가 느낀 마비와 뜻이 전혀 다르다. 마비엔 적어도 두가지 상반된 뜻이 있는 것이다. 조이스가 말한 부정적인 뜻과 사포가 말한 긍정적인 뜻의 마비.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인류 역사상 켜켜이 쌓인 업과 문제들에서 부분적으론 해방되었을지라도 여전히 그것들에 묶여 있다. 이차 세계 대전 무렵에 일어난 냉전과 그 후의 소련의 붕괴 및 그 이후의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이은 현대 사회는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재앙들로도 국내외 할 것 없이 얼룩져 있다. 마비라는 말로도 부족할 것이다

사랑이 통용되는 범주에서도 사람을 부정적으로 마비시키는 일들이 곧잘 일어난다. 서이초 교사의 억울한 자살이나 그 뒤에 이은 비인간적인 처사들. 가족이나 사회의 보살핌을 받지 못해 사회적 일탈이 늘어나 칼부림 같은 사건들의 범죄로 파생되는 것도 그 일환들이다.

사람들은 대개 누구나 온몸이 마비될듯한 긍정적인 사랑의 전율에 짧게라도 쌓인다. 사춘기 때 올 수도 있고 늦게 올 수도 있다. 마비라는 범주완 다를지라도 유년기에 행복한 시간을 갖거나 사회에서 맺어진 사람 관계에서도 온화하고 치유적인 정서에 젖을 수 있다.

부정적인 마비와 긍정적인 마비는 이렇듯 지금 우리 사회에서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전자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분노와 슬픔, 개탄의 목소리가 울리기도 한다.

부정적인 마비를 말을 바꾸면 훈육이나 폭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회나 제도가 자신의 편익을 위하여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길들인다. 더욱이 길들이기가 편의와 행복을 준다는 너스레를 떨며 속임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게 문제이다. 길들여짐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모종의 편익과 즐거움, 불편의 제거가 선물인 듯 주어진다.

이런 것이 은근히 대대적으로 일어날 때 인지하기가 쉽지 않다. 어하다 보니 당했고 그 이후에 알아차려지면 그나마 다행이다. 속아 넘어가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며 그 왜곡된 상황이 일상이 된다. 슬프고 억울하고 한심하고 어이없는 상황이다.

사포가 말한 마비, 사랑의 빛에 휩싸인 전율은 환대라는 말로도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사랑이 오가는 사이에 환대가 일어난다. 어쩔 줄 모를 정도로 좋아서 상대가 오는 소리에도 놀라 맨발로라도 달려간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우리 사회를 밑바닥에서 이끌어온 힘 중 하나가 환대의 정서와 마음이다. 식민지나 전쟁, 그 이후의 굴곡된 상황들 속에서도 사람 사이의 관계가 훼손은 되더라도 근저에서 가슴 저미게 붙들어주는 힘이다. 그런 아름답고 그윽한 것이 붕괴되는듯한 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피폐해지는 면도 있다. 그런 정서와 마음이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당히 취약해진 상태에서 사람들을 마비시키는 나쁜 훈육과 폭력이 사회를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음이 현실에 가깝다. 이 상태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마비라는 말이 지닌 양면성을 깊게 들여다보고 담론으로 깊숙히 끌고가는 것도 답답하고 암담한 현실 타파의 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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