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2023년 9월 25일은 예관(예觀) 신규식(申圭植, 1879-1922)선생이 중국 상하이에서 상하이 임시정부의 통합을 25일간 호소하다가 순국한 지 101주년이 되는 아주 뜻깊은 날이다. 

  교육자이자 항일독립운동가인 신규식 선생은 1879년 1월 13일 충북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아버지 신용우(申龍雨)와 어머니 전주최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신용우는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 이명(異名)은 신정(申檉)·신성(申誠)·신목성(申木聖), 자는 공집(公執), 호는 예관(예觀)·여서(余胥)·일민(一民)·청구(靑丘)·한인(恨人), 본관은 고령신씨(高靈申氏)다.

  어린 시절 신규식은 비교적 여유 있는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 자랐고, 한학을 공부했다. 1895년 상경해 한성부 중서 정선방 이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거주했다. 1896년 4월 20일 관립한어학교에 입학해 3년간 중국어, 한국사, 지리 등을 배웠다. 1900년 9월 14일에는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해 군사교육을 받고 1903년 9월 20일 졸업해 장교로 활동했고, 고향에 산동학교·덕남서숙 등을 세워 신학문 보급에 앞장섰다. 1905년 3월 2일에는 6품에 승륙(陞六)됐고, 1906년 1월 23일에는 정3품에 올랐다. 

  그 후 부위(副尉)로 승진해 재직하던 중 1905년 고향에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소식을 듣고 지방 진위대와 연락해 거사를 계획하다가 실패했다. 이에 음독자살을 기도했으나 목숨은 건졌고, 대신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그래도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등 애국 계몽 단체에 참가했고, 중동학교·청동학교·문동학교 등의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1909년 대종교에 귀의하며 광산을 경영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다시 음독자살을 기도했으나 대종교 창시자인 홍암(弘巖) 나철(羅喆)의 만류로 재차 목숨을 건졌다.

  191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 후 일선(逸仙) 쑨원(孫文), 던추(鈍初) 쑹자오런(宋敎仁), 실암(實庵) 천두슈(陳獨秀), 잉스(英士) 천치메이(陳其美,) 등 중국의 혁명가들과 교류하면서 중국동맹회에 가입해 한국인으로서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여했으며 중국에서 줄곧 독립운동을 했다. 이런 인연으로 훗날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 쑨원의 호법 정부와 그를 계승한 장제스(蔣介石, 본명 蔣中正)의 중국 국민당이 지지하게 된다. 군사 교육도 장려해 한국 청년들을 중국 각지의 군사학교에 입학시키고, 독립운동가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을 쑨원에 소개해 운남육군강무학교에 입학시켰다. 

  1912년 7월 동제사를 조직해 공화주의 독립혁명을 총괄 지도했다. 동해의 신해혁명계 인사들과 친교를 맺기 위해 신아동제사를 조직하고  1917년 7월 공화주의 독립선언서인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시인·문학평론가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시인·문학평론가

  1918년 미국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14개 조의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 이후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에 취임했다. 1921년 11월 3일에 쑨원이 이끄는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임시정부의 승인과 지원을 얻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22년 임시정부의 내분으로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초명 李承龍)에 대한 대통령 불신임안이 그의 불참 속에서 통과됐다. 이에 병상에서 25일간 절식을 하다가 독립을 기원하는 유언을 남기고 얼마 뒤 병세가 악화돼 1922년 9월 25일 중국 상하이에서 순국했다. 그의 유해는 1993년 8월 10일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 8호에 이장됐다.

  저서로는 동제사 결성 때 연설한 내용을 정리한 「한국혼」과 유고 시집인 「아목루」가 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