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법무법인 충청 변호사·법무부교정자문위원

여름 휴가를 다녀왔다. 휴가철이 한참 지난 9월 중순이었다. 소속 변호사들과 직원들 휴가를 먼저 챙긴 대표의 숭고한 희생으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실은 자초한 것이다.

'시장이 반찬이다.'라는 허기짐과 행복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 격언은 나의 일상에도 적용된다. 한여름 홀로 로펌의 일을 감당하다 휴식에 대한 허기가 극에 달할 때 여행을 가면 효용이 극대화되더라는 경험을 한 후부터 한여름 외로운 노동은 밥을 맛있게 먹기 위한 단식같은 의식이 되었다.

여행지는 다낭으로 정해져 있었다. 다낭은 올 초 변호사 골프 동아리에서 단체여행으로 다녀온 적이 있었다. 목적이 뚜렷한 여행이었기에 빡빡한 일정은 필수였다. 결과적으로 여행이라기보다는 골프 전지훈련(!)에 가까웠다.

단체로 움직여야 했던 까닭에 이동 중 창밖에 흥미로운 장소가 보여도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차창 밖의 다낭은 아름다웠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창 밖 풍경 속에 있지 못했다. 여행지에 스며드는 여행을 추구하는 나이기에 아쉬움이 컸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다시 올 것을 기약했고 해를 넘기기 전 이를 실행했다.

출발당일. 휴가의 허기를 더욱 느끼기 위해 더 일찍 출근해서 업무를 쥐어짰다. 미리 업무를 해둬야 할 필요도 있었다. 폭풍같은 업무를 끝내고서야 비로소 가까스로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출국 중에도 스마트폰은 내 오른쪽에 귀에 늘 붙어있었다. 항공기에 몸을 싣고 스마트폰 비행모드를 권하는 방송이 나올 때까지 의뢰인의 전화에 친절히 응했다. 고단한 업무는 휴가를 더욱 달콤하게 만들어 줄 것이기에 그 순간의 고단함을 즐겼다.

땅에 마찰되는 바퀴소리가 잦아들었다. 동체가 상공에서 안정을 찾아 '이제 자유다'라는 생각이 들 무렵 잠이 들었다. 나의 수면친화적 성향 탓에 비행기 좌석의 협소함은 문제되지 않았다. 6시간의 꿀잠에서 깰 무렵 나는 이미 다낭에 도착해 있었다.

무계획한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해변을 배회하고, 시내를 걷다 마주친 곳에서 식사를 하고, 근처 적당한 곳에서 마사지를 받으며 격렬하게 헛된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평소 일분일초를 긴장하며 살았기에 그 정도 게으름은 스스로 허락할 만했다.

유일한 사전 계획은 숙소였다. 한밤에 도착하는 항공권이어서 숙소를 현지 조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해변가 로컬 호텔에 짐을 푸는 것으로 나의 이번 휴가의 계획은 벌써 달성되었다. 그렇게 다낭 첫날밤은 지나갔다.

이튿날 암막커튼 사이를 뚫고 들어온 날카로운 햇살이 눈을 찔렀다. 두꺼운 커튼을 활짝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끝없이 펼쳐진 다낭 해변이 내려다 보였다. 하얀 포말을 머금은 파도가 백사장을 쓸고 있었다. 야자수 빽빽한 해변도로의 경치는 내가 휴양지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무엇보다도 할 일없는 무료한 아침이 반가웠다.

호텔에서 제공되는 쌀국수와 빵으로 느즈막한 조식을 즐겼다. 열대과일로 입가심하고 커피와 함께 게으름을 만끽했다. 해변을 걸어볼 요량으로 호텔을 나서는데 주차장에 잔뜩 세워져 있는 모터사이클들이 보였다. 여행객 차림의 서양인들이 하나씩 몰고 나가는 것에 미루어 렌탈용으로 보였다.

대학 때 하숙집 아주머니가 '폭주족'이라 부를 만큼 나는 바이크를 즐겼다. 부르릉 달리는 그들의 모습은 나의 질주본능을 자극했다. 이번 여행 동반자는 바이크로 정했다. 렌탈비는 공항에서 호텔까지 지불한 택시비에 한참 미치지 못할 만큼 저렴했다.

처음 베트남에 와서 놀랐던 바이크 파도 속에 나를 던졌다. 바이크 상태는 양호하지 않았지만 왕년의 폭주족답게 이내 바이크에 적응했다. 바로 시장으로 가서 동남아 여행의 필수품인 코끼리 바지와 슬리퍼를 사입었다. 뒷골목을 훑기엔 바이크가 제격이었다. 우연히 마주한 뒷골목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거리의 낮은 의자에 앉아 연유커피를 마셨다. 지칠 때쯤이면 마사지를 받는 호사를 누렸다. 가뜩이나 저렴한 베트남 물가인데다가 관광지를 벗어난 현지인의 사기같은 물가를 체험하니 귀국 후 한국살이가 걱정될 지경이었다.

바이크를 탄다는 설렘은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뜨게 만들었다. 아침 바람을 맞으며 해변도로를 달려 해변 끝 사찰에 도착했다. 사찰의 반대편 해변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었다. 지도를 보니 그 끝에 호이안이라는 도시가 있었다. 다낭 못지않게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대부분 예약된 미니버스로 가거나, 택시 등을 이용한다고 한다. '닥치는 대로 사는 인생 그냥 가보자. 내겐 바이크가 있지 않은가?'

호이안 방향으로 출발했다. 파도소리 생생한 야자수 도로를 지나 한적한 시골도로에 다다르자 목적지 표지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행선지가 같은 바이크 무리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엔진을 식힐 겸 멈춰서 사탕수수를 통째로 짜서 만든 원액으로 갈증을 달랬다. 도중에 열대성 소나기를 만나 몸이 흠뻑 젖었다. 바이크의 속도가 만든 바람은 젖은 옷을 이내 말려주었다.

한 시간 남짓 딜려 호이안에 도착했다. 적당한 곳에 바이크를 세우고 올드타운으로 갔다. 그곳에서 가장 높아 보이는 건물의 루프탑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호이안의 석양을 즐겼다. 거리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면서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밤이 됐다. 호이안의 밤은 낮보다 아름다웠다. 잊지 못한 풍경을 뒤로하고 숙소로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 했다.

마지막 날 일찌감치 숙소를 나왔다. 짐을 프론트에 보관시키고 바이크로 다낭 이곳저곳을 헤맸다. 이날 들렸던 가게의 분짜와 반쎄오 맛과 한국인에 대한 호의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시장 한 켠에서 오래동안 마사지를 받고 늦지 않게 공항으로 갔다. 쉬지 않고 험하게 돌아다닌 탓에 돌아오는 밤비행기 내내 깊은 잠에 빠졌다. 월요일 아침 일찍 귀국해서 오전부터 다시 치열한 업무에 투입되고 나니 불과 몇 시간 전의 여행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권택인 법무법인 충청 변호사·법무부교정자문위원
권택인 법무법인 충청 변호사·법무부교정자문위원

이번 여행은 격렬하게 육체를 다뤘고 너무 큰 자극에 노출됐다. 게으름의 미학을 담은 담담한 여행일지를 쓰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즐거운 실패였다. 당분간 나의 여행기록은 모터싸이클 다이어리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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