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에세이] 김병연 수필가

고난 속에서 사람은 한 차원 높이 성장하는가 보다. 내 인생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된 것이 고1 여름방학 때였다. 뜨거운 여름날 팔밭(火田)에서 담뱃잎을 따 가지고, '바지게'에 잔뜩 싣고 뒷산을 넘어 오자니, 비 오듯 흐르는 땀과 담뱃진이 범벅이 되어 온몸이 화끈 거려 죽을 지경이었다. 담뱃짐을 바쳐 놓고 숨을 몰아쉬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산간벽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사꾼 소년에 불과 했던 내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부임한 새내기 여선생을 동경(憧憬)한 것이 '교사의 꿈'이 되었지만, 이대로는 교사는커녕 등짐 지며 살아갈 앞날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렇다 공부다! 공부만이 짐을 벗을 수 있겠다.

그날 저녁 아버지와 단판을 지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영동(永同)에 방하나 얻어 주세요. 죽을힘을 다해 공부하여 선생님이 되겠어요! " 이듬해 3월 고2가 되면서부터 자취를 시작한 곳이 로터리부근 먼 친척 아저씨 댁이었다. 그 집에는 딸 넷에 아들 둘 6남매가 있었는데! 아저씨가 병으로 아파서 큰 딸인 '순덕(順德)' 누나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집안일을 돕고 있었으며, 둘째 딸 '순자'는 성악에 소질이 있어서 장학생으로 여고1로 입학했다고 한다.

여고1 '순자'의 눈에 비친 나는 보잘 것 없는 시골뜨기에 불과하였다. 나 역시 사생결단(死生決斷)식으로 공부에 전념하느라 옆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배구선수로 운동하고 어두울 때 돌아와 밥하고 공부하고! 지성감천이라더니 2학기부터는 수업료면제 장학생이 되었지만 '순자'는 알 턱이 없었다. 그해 11월 '영동고 학생회장선거'에서 시골뜨기가 당선이 되자 그 소문이 여고까지 퍼진 모양이다. 보잘 것 없던 시골뜨기가 단숨에 자랑스러운 오빠로 부각되어, 말 많은 동네에 오빠자랑 하느라! 순자 입에 침이 마를 날이 없었다. 이를 계기로 우리 남매는 별 같은 꿈을 안고, 꿈을 키우며 꿈같은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녀의 일생은 불같은 열정으로 혼신(渾身)을 다한 삶이었다. 여고시절 별을 향한 꿈이 영글어 그녀에게 붙은 수식어는 '별' 그 자체였다. 뮤지칼 배우, 드라마작가, 한국화가 등 예술방면에서는 다양한 재능을 발휘하였던 김순지(후에 순자에서 개명을 함)! 특히 중국 유학시절에는 당시 최고지도자인 '등소평'의 딸'등림'(鄧林)과 두터운 친분을 통하여, 냉전시대 한.중간 우의(友誼)증진을 위한 가교역할을 했다. 중국유학시절 손금을 보는 관상가로부터 '왼손 약지 밑에 별를 쥐고 있어서, 원하는 일은 모두 이룬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인생일대의 클라이막스(절정)가 있는가 보다. 2003.10월 군수, 법원장, 경찰서장 등 영동의 몇몇 기관장들과 함께 양산의 한 식당에서 회식이 있었다. 당시 나는 영동교육장으로서, '순자'는 150만부 판매실적의 베스트셀러 '별을 쥐고 있는 여자'의 작가 '김순지'로서 초청인사가 되어 참석했었다. 귀로의 내차 안에서 "오빠! 오늘 너무 좋다. 기쁘고 너무 행복하다. 나는 예술가로서, 오빠는 교육자로서, 학창시절 우리들의 꿈이 영근 것 같아서! 우리가 자랑스럽지 않아!? " 라던 '순자'! 감미로운 목소리가 생생하다. 지내고보니 그날이 그녀와 생애에 있어서 절정(絶頂)이었던가 보다.

21년 10월5일 홀연히 그녀가 유명(幽明)을 달리하였다. 태어날 땐 예고(豫告)가 있었지만, 떠날 땐 말없이 떠나는가 보다. 군청 입구 영동여중고기념 동상 앞에서 노제(路祭)를 지낼 땐, 고인을 마지막 떠나보내는 아쉬움에 지인들 눈가에는 이슬이 마를 줄 몰랐다.인생은 만남으로 시작하여 헤어짐으로 끝맺음하는가 보다. 순자와 나의 만남은 고2-3 2년에 불과했다. 그 후 40년만인 2003년에는 우리들의 꿈이 결실하여인생의 절정(絶頂)을 이뤘지만, 이태 전에 그녀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막을 내렸다. "이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중에서, 그별 하나를 쳐다본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병연 전 영동교육장
김병연 수필가

10월이 되면 생각난다. 별을 쥐고 태어나, 별을 쥐고 살다가, 별을 쥐고, 별 속으로 사라진 女人이! 지금쯤 어느 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까? 그렇게도 정다웠던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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