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줄다리기는 져야 이기는 게임이다. 보통의 스포츠에 있는 금도 없고 점 하나 찍고 양쪽에서 잡아 당기는 아주 단순한 게임 이상의 문화이다. 뒤섞여 뒤로 넘어지면서 이긴다는 느낌이 온몸으로 저릿 전해진다. 그보단 한판 즐겼다, 놀았다라는 느낌이다. 져도 아쉬움이 그 순간 털어내지며 게임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 구경하는 사람들 모두가 크게 한번 웃는다.

서양의 스포츠는 대개 금이 있다. 축구, 농구, 테니스를 보면 금을 그어놓고 그 안에 경기의 룰이 있다. 그것과 딱 비교할 상황은 아니지만 차전놀이나 판소리, 강강수월래 등 우리나라 전통 놀이 및 문화엔 금에서 자유로운 특징이 있다. 금을 사이에 두고 선수와 관객, 스포츠와 관전을 나뉘는 서구식 방식과 달리 주객 분리 없이 혼융의 미학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모교인 청주 교동초등학교 총동문 체육대회의 행사 중 하나로 행사는 코로나로 인해 4년만에 재기되었다. 축구도 하고 가수를 초대해 노래 공연도 즐겼지만 줄다리기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다행히 우리가 속한 편이 뒤로 넘어지면서 이겼다. 나눠준 막장갑을 껴서 밧줄의 감각까진 얻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 밧줄을 팽팽하게 당길 때 손바닥의 얼얼함은, 장작을 도끼로 팰 때완 또다른 얼얼함을 선사했다.

어릴 때는 줄다리기를 하는 것을 제법 볼 수 있었다. 학교 운동장 말고도 어느 공터나 넓은 광장에서 남녀노소 모여 줄다리기 하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왠지 기분이 좋았다. 그런 것이 이젠 거의 사라지다시피 된 것이다.

교동초등학교 총동문 체육대회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도 돈다. 아닌게 아니라 몇 회 아래 기수로는 천막 자체가 없다. 모이지 않는 것이다. 아쉬움도 크지만 단절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상실이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에서도 일어남에 이 시대적 병폐를 어떻게 해야 하나 가슴이 아프다 코로나 덕에 생태계가 일부라도 복원된 효과도 있고 코로나가 준 단절은 상당히 극복되어 있지만 문화 전반에 큰 변화를 야기했다.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사람 대 기계의 관계로 더 많이 바뀌어졌고 비대면 수업에 애로를 느꼈다가 이젠 그게 더 편해졌다고 실토하는 교수들도 있다. 그리고 사회는 이미 초경쟁 사회로 더욱 진전되었다. 인구절벽이나 지방 소멸, 세대 간의 차이를 너머 단절에까지 이르는 병폐들도 이제 너무도 심해서 구조적이 된지 오래 되었다. 청주만해도 빈 집들이 만만치 않다. 농촌지역에 가면 아이들과 젊은 세대가 거의 안보이고 노인들 위주인데다가 빈집들이 계속 늘고 있다. 시간이 더 흐르면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강화될 것임이 틀림없다.

사람은 외로움을 타면서도 집단에 완전히 속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고립감은 고독을 주어 독립심을 길러주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게 되면 소외와 더불어 인간적인 정마저 상실되어 문화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건강하지 않게 된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마을에서 남녀노소 모여 줄다리기나 차전놀이, 농악을 즐기던 문화에서 그리 먼 세월이 흐른 것도 아니다. 이기고 지는 차원을 벗어나 서로 배려하고 격려하는 환대의 문화가 시급하다. 줄다리기는 물론 지면서 이기는 놀이는 아니다. 뒤로 가고 간혹 넘어지기도 하는 모양에서 져야 이기는 놀이로 상징적 요소를 품을 수 있다. 손에 닿는 밧줄의 감각을 느끼고 여러 사람들이 합심하는 끈끈함과 정을 느낄 수 있다. 줄다리기에 담겨 있는 아름다운 가치들처럼 복원 가치가 있는 것들은 복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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