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박은지 문화부장

# 장면 1. 그녀는 자료조사차 국과수를 방문했다. 당시 등에 칼을 맞은 변사자를 마주하고도 일로써 대했다. 부검을 위해 변사자 시신의 등을 돌리는 순간, 더 이상 일로써만 대할 수 없었다. 변사자가 착용한 머리끈이 그날 부검현장을 찾은 자신의 머리끈과 같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작가 김은희씨의 일화다. 이뿐 아니라 한나절 이상 가스불을 켜고 외출한 소설가 천명관, 개집살이를 비롯해 휠체어타기, 고층빌딩 창문닦이를 한 기자 남형도의 에피소드까지.

9월 충북교육도서관 '북 페스티벌'부터 10월 김수현드라마아트홀 '작가 초청강연', 한국언론진흥재단 '저널리즘 특강'으로 이들을 만난 일은 신선한 자극이 됐다.

장르물의 대가인 김은희,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영화감독 천명관, 체험기사를 표방한 기획물로 체헐리즘이란 고유명사를 탄생시킨 기자 남형도씨의 공통점은 '책을 읽는다'였다.

작가 김은희는 자료조사를 위해 한 분야의 책을 파고드는 것은 물론 수시로 도서관을 찾는다고 했다. 작가 천명관은 어릴적 친구네 집에 있는 30권짜리 문고(文庫)전집을 단 며칠만에 허기가 진 듯 읽기 시작하며 책에 눈을 떴단다. 기자 남형도는 대학시절 도서관에 틀어박혀 종종 책을 읽었고 소설가 김애란 작가의 작품을 즐겨읽는다고 밝혔다.

K-콘텐츠가 어느 때보다도 주목받는 시대, 이들의 얘기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드라마 '싸인', '시그널', '킹덤', '악귀'로 대박드라마를 만들어낸 김은희,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부커상 올해 최종 후보에 오른 소설 '고래'의 천명관, 8만여명이라는 압도적 숫자의 구독자를 보유한 기자 남형도가 지닌 이야기의 힘의 배경엔 책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독서가이자 애서가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1년 국민 독서실태'를 살펴보면 성인의 연간 종합 독서량은 4.5권에 그친다. 지난 1년간 종이책, 전자책, 오디오북을 포함한 어떠한 책도 5권을 채 읽지 않았다는 말이다.

나의 연간 독서량은 어떨까. 2021년 당시 온라인 서점 도서 구매내역을 살펴봤다. '완전한 행복', '우리말 어감사전', '개소리에 대하여', '포스트 트루스', '질의 응답', '뉴욕타임스 편집장의 글을 잘 쓰는 법'등 19권을 샀지만 완독한 책은 손에 꼽을 정도다.

기자 출신 작가 정진영의 소설 '침묵주의보'에는 책을 읽지 않는 기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자 자기반성이 나온다.

'세상에 기자만큼 무식한 직종이 어디 있냐? 바쁘다는 핑계로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으면서, 자존심만 더럽게 센 놈들이지. 얼마 전에 미국 대통령 방한했을 때 기자들이 한 놈도 질문하지 않는 모습 봤지? 기자들이 왜 질문을 안 하냐고? 뭘 알아야 질문을 하지! 그런 주제에 누가 쌈빡한 질문을 던지면 잘난 척 한다고 뒤에서 지랄들을 한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쓴 '기생충' 리뷰가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이유는 그가 표현한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 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라는 평이 한마디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심심(甚深)한 사과'를 '심심하다'로 오해하거나 '사흘'이 '4일'인 줄 알았다는 소리가 이제 더 이상 우습지 않다.

문해력이 화두로 떠오른 시대, 김은희, 천명관, 남형도를 만남으로써 다시 책이 구원이 될 것임을 믿게 된다.

천명관씨는 책을, 구체적으로는 소설을 왜 읽어야 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나의 삼촌 부르스리' 서문을 인용해 답했다.

박은지 문화부장
박은지 문화부장

"어쩌면 모든 소설은 결국 실패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는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주진 못해도, 구원의 길을 보여주진 못하더라도 자신의 불행만이 부당하고 외롭기만 한 일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된다면 의미있지 않을까. 내 소설이 누군가에게 그런 의미가 되길 원한다."

초겨울에 들어서는 길목, 다시 책 읽을 결심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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