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에세이] 김병연 수필가

결혼시즌이다. 인구절벽시대에 결혼하는 것만으로도 축복은 이요 애국이라고 한다. 얼마 전 고교 동창으로부터 모바일 청첩장이 날라 왔다. 40이 넘어서야 간신히 결혼하여,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늦둥이 하나를 얻었는데 금년에 서른일곱이란다. 예식장 하객으로 찾아온 동창들은 모두가 백발성성(白髮星星)한데, 마음만은 타임머신을 타고 60여 년 전 고교시절로 돌아가 깔깔대는 진풍경을 연출하였다.

이맘때만 되면 중국학교에서 근무할 때 결혼풍경이 생각이 난다. 한국의 대학에서 석사학위까지 취득하고 한국어를 지도하고 있는 동료 여선생이 결혼을 한다고 해서 축의금 봉투를 정성껏 만들어 전달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예식장이 어디이고, 몇 시에 한다는 말이 없었다. 동료 교사들 모두를 예식장에 초대하는 게 아니라 식이 끝나고 식사 초청한다는 것이다. 예식장에 초청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결혼식을 올린 그날 저녁에 동료교사로부터 결혼한 신부집으로 오라는 전달이 왔으니 함께 가자고 하기에 따라나섰다. 아마도 예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은 안간 모양이다. 학교 정문에서 한 20여 분 걸으니 3층 단독주택이 나오는데, 대문에는 신랑 신부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내용이 적힌 대형 애드벌룬이 떠 있어서, 멀리서 봐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2층 베란다에서 아래로 늘어진 휘황찬란한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어서 한 층 분위기를 북돋운다. 입구에는 손님들이 먹다가 남은 음식물이 질펀하게 깔려있고, 바닥에는 하객들이 버린 잡동사니가 이리저리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아낙네들 십 여 명이 뒤마무리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잔칫집다운 정겨운 정경이었다.

꼭대기 3층에 붉은 색으로 곱게 단장한 신혼 방이 눈길을 끌었다. 신방을 차릴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신랑 친구들은 돌아갈 생각을 하질 않고 북적거린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호지 문에 구멍 뚫고 신방을 들여다 본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오른다. 신부는 하루 종일 하객들에게 시달려서 그런지 피곤함이 역력하였다. 타임머신을 타고 4-50년을 거슬러 올라간 기분이다. 풋풋한 인정이 넘쳤던 우리네 전통혼례가 이곳 중국에서 되찾은 기분이었다.

알고 보니 이 집은 신부 집이 아니라 신랑 집이었다. 낮에는 신부 집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저녁 무렵이 돼서 이곳 신랑 집으로 온 것이다, 여기에 모인 사람 대부분은 신랑 집 친척들이라고 한다. 사돈에 팔촌까지 친척들이라면 모두 신부를 보러 온 것이다. 집안에 식구가 하나 늘었으니 당연히 와 봐야한다는 것이다. 친척들 간에 우애가 참으로 좋아 보였다.

그동안 필자는 한국에서 치러지는 예식장 결혼식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중국에는 아직까지 결혼예식장이 없다고 한다. 일부 극소수만이 호텔에서 예식을 올린다고 한다. 낮에는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려와서 저녁에 신랑 집에서 식을 올리는 것이었다. 절차는 사회자가 "천지(天地)에 일 배(拜)!" "부모님께 일 배! " "신랑신부 일 배!" 라고 소리치면, 지시에 따라 세 번 절하는 것으로 끝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혼인(婚姻)이라는 말이 생각이 난다. '혼(婚)'이란 '저녁(昏)에 여자(女)를 데리고 온다'는 말이 생각이 났다. 예로부터 혼인을 '인륜(人倫)대사(大事)'라고 했다. 한 개인의 일생을 좌우하는 중대한 일로서 지극히 신성하고 고귀한 행사라는 뜻이 담겨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신성함과 고귀함이 점점 퇴색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김병연 수필가
김병연 수필가

혼인을 통하여 집안간의 온정을 돈독히 하고, 혼인의 숭고한 가치를 다지는 풍습이 그곳에는 아직까지 살아있음을 보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사모관대를 쓴 신랑과 연지곤지를 찍은 신부! 정겨웠던 옛날옛적 우리들의 결혼 풍속! 이국의 결혼 풍습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이 향수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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