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에서] 이복섬 제천고 수석교사

오늘 2교시는 3학년 수업이 있었어. 수능을 일주일 앞둔 고등학교 3학년 교실은 숨소리 내는 것도 조심스럽더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큰소리로 인사하고 웃었던 아이들에게서 묻어나는 조바심과 절박함이 마음을 무겁게 하더라고. 그나마 선생님들과 어머니들이 함께 만들어 각 교실에 배부한 탐스러운 꽃바구니가 교탁에 놓여 있었는데, 지친 아이들이 잠시라도 눈 돌려 쉴 수 있게 했기를 빌었어. 3교시에 2학년 교실에 들어가니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은 듯 홀가분하고 가벼워지더구나.

진로와 연계한 주제 탐구 보고서 제목을 정하는 날이라 테블릿으로 정보를 찾아보거나 비슷한 계열의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에 내 눈길과 발걸음도 생기가 더해지는 것 같더라고. 더불어 1학기 교과 박람회에서 열심히 교과 설명을 하던 모습, 1학기에 탐구해 왔던 내용을 발표하는 사회, 자연과학 탐구 발표회, 진로 탐구 발표회에서 보여주었던 열정 가득한 모습까지 더 해지니 흐뭇하고 대견하기만 하더라. 너희들은 항상 우리를 울게도 웃게도 만들곤 하지. 그래도 웃을 때가 더 많았고 너희 만이 줄 수 있는 느낌과 감정들은 너무 너무 소중하다고 늘 생각하고 있지.

이복섬 제천고 수석교사
이복섬 제천고 수석교사

이제 몇 개월 후면 너도 3학년이 될 테지. 선택과목 수업과 교과 및 전공 관련 활동을 숨가쁘게 열심히 해 왔던 너이지만 그래도 아직 2학년이라 3학년보다는 여유가 있어 보이긴 하더라. 학교에 개설되지 않은 과목 때문에 공동 교육과정까지 참여하는 너의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몇 시간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가끔 생각해 보곤 했는데도 여유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수능 시험일까지 남아 있는 시간 때문이겠지. 앞 시간에 보았던 3학년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말인데 분위기상 할 수가 없어서 2학년 교실에서 칠판에 최근 읽었던 책의 글귀를 적었더니 아이들이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더라. 칠판에 적은 글은 독일어였거든. 사실 나도 독일어는 읽을 줄 모르는데 어떤 아이가 테블릿의 번역기 앱을 켜더니 사진을 찍어 독일어로 발음을 따라 하더라고. 칠판에 쓴 것은 'Alles ist noch unentschieden. Man kann werden, was man will' 이야. 예전에 읽었던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라는 책의 구절이 최근 읽었던 책에 인용되었더라고. 한국어로는 '아무 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란다. 고등학교 2학년, 3학년이 무언가를 모두 결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았지. 너는 지금까지 잘 해 왔고 앞으로도 잘 할 것이고 그러므로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길 바래. 또한 너를 항상 응원하는 사람들이 함께한다는 것도 기억하고.

제천에서 선생님이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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