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문학의 죽음이니 하는 말이 쟁점화된지 오래 되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문학은 시대의 견인차 노릇을 했다. 1990년도에 들어서 시대의 흐름은 크게 변한다. 소비 사회 성격이 한결 강해지고 의식의 표층화도 심해진다. 독서량이 많지 않은 사회에서 정보화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그 추세는 더 굳어졌다. 문학의 죽음이라는 담론이 대두되면서 많은 논란이 야기되었다.

세월이 훌쩍 흐른 2023년인 지금 문학의 죽음을 다시 꺼내는 것이 타당한가. 문학의 죽음이 이젠 당연하다는 듯 치부되기도 하는 시대에 생뚱맞은 발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의미도 달라진다.

문학의 죽음을 말하기 전에 언어가 죽은 적이 있는가? 인류사에서 언어가 만들어지고 까마득한 시간이 흘렀다. 문명의 미래엔 언어가 사라질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언어가 탄생된 이후 지금까지 언어는 단 한 번도 죽지 않았다.

언어가 언어 자체로 존재 가능한가?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세계가 일치하는 세계를 꿈꿨지만 후기에 들어 그 시도에서 스스로 벗어났다. 언어와 세계의 일치는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바람직한 현상도 아니다. 맥락이나 상황의 중요함을 비트겐슈타인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다.

엄마 손은 약손 아기 배는 똥배. 이 말은 지금은 거의 쓰지 않지만 필자가 어린 시절엔 수도 없이 듣던 말이다. 엄마 손은 약손. 이 문장은 곧 은유이다. 죽은 은유라고 해서 문학에서는 별 인정은 받지 못하지만 말이다. 우리의 일상 언어에도 은유가 묻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확장하면 문학의 발달이 상대적으로 저조했거나 문학이 활성화되기 이전에도 언어엔 문학적인 요소가 배어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서양 문학의 여명기에 있는 호메로스도 지금부터 28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문자는 그 이전에, 말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

이처럼 문학의 탄생 이전부터 언어는 있었고 까마득한 시절의 그 언어들에 문학적인 요소가 배어있지 않다고 말할 순 없다. 가령 신화 중 하나인 신데렐라 신화의 기원이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간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이렇게 큰 맥락에서 보면 언어는 죽은 적이 없으며 비중의 정도는 있을지라도 문학적인 요소가 배어있다. 문학적인 것뿐 아니라 신화, 철학, 교훈 등등 다양한 차원에서의 요소들이 촘촘히 배어 있는 종합적인 인식 체계인 것이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언어가 문학의 기본임이 틀림없다. 문학은 언어 이상이지만 언어 없이는 존재 불가능하다. 문학의 죽음이라는 담론이나 그 배경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소비 사회가 강해지고 정보화 사회 등 시대의 변천은 문학의 중요성을 상당히 희석시킬 위협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어떤 담론이든 유효성은 있지만 그것이 극단화되거나 고정적이 되면 필요에 의해 만든 그 개념에 의해 본질 및 정작 중요한 것들이 갇혀버릴 수 있다. 문학이 진짜 죽었고 더 나아가 죽어도 괜찮은, 죽어야 되는 것으로 인식의 장난을 치게 된다. 문학의 죽음이라는 말이 나온지 삼심년도 지난 지금 이 문제를 이렇게 언어와 결부시켜 크게 러프하게 말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거라는 직감에서였다. 문학의 죽음이라는 담론의 배경은 충분히 이해한다. 인류 역사에서 언어는 탄생한 후 아직까지는 죽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더욱이 언어는 이미 문학적인 면도 있다. 그럼에도 그러한 언어를 바탕으로 한 문학이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문학을 다른 중요 가치들과 마찬가지로 추방하다시피 한 현대 문명에서 현대인들은 과연 행복한가. 그렇지 않다면 문학의 의미를 다시 물어야 할 요청이 생긴다. 문학의 죽음이라는 담론을 더 깊은 차원까지 끌고가서 새로운 시각으로 재성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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