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최원영 K-메디치연구소장·전 세광고 교장

1968년 9월, '6.8 혁명'이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을 때,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있었던 유명한 사건! 혁명 방향에 관한 토론회가 대학 강당에서 열렸는데, 뤼거라는 여성 청중이 토론석의 사회자에게 토마토 세 개를 투척했다. 6.8 혁명의 목표가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면서 정작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자, 분노의 표시로 토론자들에게 토마토를 던진 것이다. 토마토 한 개가 사회자의 얼굴에 터지면서 그 장면이 언론에 집중 보도되고, 이를 기폭제로 여성 해방의 기치가 유럽 전역에 높이 타올랐다. 30년이 지난 1998년, 6.8 혁명을 회고하는 토론회가 베를린에서 있었는데, 콘퍼런스의 주제가 의미심장했다. "토마토는 얼마나 멀리 날아갔나!"

2023년 노벨상 시상자가 발표되면서 가장 주목을 끈 것은 두 명의 여성들이었다. 평화상을 수상한 이란의 여성 인권운동가 나르게스 모하메디는 히잡시위를 주도하며 이란의 여성 억압에 항거하고, 인류의 보편적 인권 수호를 위해 치열하게 투쟁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란 정권에 13번 체포되고, 5번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3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투옥 중인 모하메디는 가족들이 대신해서 감동적인 수상 소감을 밝혔다. "자유를 향한 이란의 투쟁에서 역사적이고 엄청난 순간이며, 영광을 모든 이란인들, 특히 여성과 소녀들에게 돌린다." 이슬람국가는 물론 여성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세계 여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남긴 셈이다.

경제학상을 수상한 클로디아 골딘 하버드대 교수는 여성으로서 남녀 임금 격차 등, 노동 시장의 성 불평등 문제를 역사적 관점에서 처음 연구한 노동경제학자다. 골딘은 100여 년간 미국의 대졸 여성들의 성별 소득격차를 추적하여 여성의 경제적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시한 학문적 공로를 인정받았다. 골딘은 불평등의 원인만 지적한 게 아니고,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대안을 제시해서 더욱 주목받았는데, 성별 소득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여성을 위한 유연한 일자리를 제공해야 하고, 코로나 팬데믹 시기의 재택근무도 대안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경제적 차별 해소 없이 여성 권리 신장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차원에서, 골딘의 연구는 여성해방사에 족적을 남기는 학문적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노벨상 수상자로서 두 명의 여성이 포함된 것이 의미있는 일이라기보다는, 이들의 공로가 여성의 권리 신장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모하메디는 여성의 기본권에 대한 치열한 투쟁으로, 골딘은 여성의 경제적 권리에 대한 집요한 연구로, 여성해방에 앞장 선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이들이 여성의 권리 신장에 대한 공로로 수상했다는 점은 여성 해방 운동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원영 K-메디치연구소장·전 세광고 교장
최원영 K-메디치연구소장·전 세광고 교장

흑사병 시기의 인구격감을 소환할 정도로, 유례없는 저출산의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골딘 교수는 한국의 저출산 문제가 여성의 일자리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하며 일과 가정 사이의 균형이 저출산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국은 OECD 38개 국가 중 남녀 고용률 격차가 8위에 오를 정도로 차별이 심할 뿐 아니라 임금 격차, 승진구조 등도 불공정한 상황이다. 차별에 대한 저항으로 출산을 포기하고 있다는 여성 운동가들의 주장도 무리가 아닐 정도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여성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고, 2030년 전후의 경제인구 공백을 여성인력이 대체해야 한다는 점에서, 국가의 생존을 좌우하는 인구문제 측면에서 여성문제는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국가 과제다. 최근 정가에서 물의를 일으킨 여성 혐오 발언이나 게임 산업체의 여성 배제 사건은 우리 사회 여성인권에 대한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안이라는 점에서 매우 아쉽다. 사회적 약자가 존중받고 모든 사회구성원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인권 문화가 사회 저변에 자리 잡을 때, 국가의 품격은 고양된다. 여성의 권리가 소중한 이유다. 베를린에서 쏘아 올린 토마토가 한국 사회에서도 높이 날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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