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노트] 정혜연 플루티스트

20세기의 끝자락, 어린 시절 책에서 소개하던 21세기의 모습은 굉장했다. 자동차가 하늘을 날고 운전자가 없이 주행이 가능했다. 다양한 로봇들이 생겨 인간을 대신하기도 또는 도와주기도 하는 만화를 보며 과학소설(Science Fiction)에 흥미를 느꼈던 시절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더 이상 픽션이 아니게 되었다. 얼마 전 다녀온 미국에서 운전석이 비워진 채로 운행되는 택시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일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과학이 발전하고 새로운 세상을 맞이해도 인간이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시간'이다. 이 세상 모든 만물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만큼은 과학도 어찌할 수 없으리라. 이렇게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어느새 사계절을 지나 한 해의 마지막 달에 서있다.

열두 달이 지나고 다시 돌아온 겨울, 이 계절에 생각나는 꽃을 묻는다면 단연코 동백꽃이다. 추운 계절에 홀로 빨갛게 피는 동백꽃은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동백나무는 주로 섬에서 자라는데 그 중 동백이 유명한 여수 오동도에서 한 전설이 내려온다. 오래전 이 섬에 젊은 부부가 단둘이 살았는데 남편이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나간 사이에 어떤 남자가 섬으로 몰래 숨어 들어와 부인을 해치려고 했고 부인은 남편이 있는 바닷가를 향해 도망을 가다가 절벽에 떨어지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던 남편은 절벽 아래에서 아내를 발견했고 통곡을 하며 그녀를 묻어주고 섬을 영영 떠났다. 그러나 아내가 보고 싶어 다시 섬으로 돌아온 남편은 그녀의 무덤에서 한 나무가 자란 것을 보았는데 그 나무에서 핀 붉은 꽃이 마치 자신에게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요. 당신만을 사랑합니다.'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고 해서 동백꽃의 꽃말이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되었다.

이렇게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동백꽃하면 역시 주세페 베르디 (Giuseppe Verdi, 1813~1901)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방황하는 여인)>가 떠오른다. 세계 오페라 인기 순위 중 3위 안에 꼭 드는 작품인 라 트라비아타는 프랑스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Alexandre Dumas fils, 1824~1895)의 소설 <동백꽃 아가씨(La Dame aux cam?lias)>를 원작으로 한 오페라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춘희'라고도 불렸다. 춘희는 불치병에 걸린 파리 사교계의 꽃, 비올레타와 순수 청년 알프레도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로 뒤마 피스의 자전적 소설이다. 당시 그는 이 작품으로 파리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는데 베르디가 이 작품에 영감을 받아 오페라로 각색해 무대에 올렸다.

총 3막으로 구성된 라 트라비아타. 1850년대의 파리를 배경으로 비올레타의 호화로운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축배의 노래(Libiamo ne' lieti calici)>를 시작으로 오페라의 문을 연다. 즐거운 노래를 마칠 때쯤 비올레타가 갑자기 심한 기침을 하고 기진맥진 하는데 알프레도가 그녀를 진심으로 염려하며 사랑하는 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폐병을 앓고 있고 그동안 순간적인 향락에 젖어 살던 그녀는 순수한 그의 마음을 받는 것에 주저하게 되는데, 거듭되는 그의 고백에 결국 동백꽃 한 송이를 주며 꽃이 시들면 다시 찾아오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 한 두 사람은 파리 근교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이 몰래 그녀를 찾아와 아들과 헤어지기를 권하면서 그녀가 알프레도를 떠난다. 그녀가 떠난 이유를 알지 못했던 알프레도는 분노했고 오해와 갈등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녀의 병은 더 악화가 되어 죽음을 눈앞에 앞두게 된다. 결국 그녀는 뒤늦게 모든 사실을 알고 돌아온 알프레도의 품에서 숨을 거두며 막이 내린다.

비극적인 이야기에 베르디의 음악까지 더해져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라 트라비아타는 1853년 베네치아에서의 초연에는 실패를 했다. 그 이유로는 소프라노가 비올레타 역에 맞지 않아서라는 설도 있고 또 내용이 당시 시대상이랑 맞지 않아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점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고 현재 가장 사랑받는 오페라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정혜연 플루티스트
정혜연 플루티스트

20세기를 대표하는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1923~1977)는 이탈리아의 대표 오페라 극장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이 비올레타 역을 맡기를 굉장히 바랬다. 그러나 당시 극장의 총감독은 이탈리아 극을 그리스인인 마리아 칼라스에게 맡기는 것을 반대해서 거의 5년간의 공방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공방 끝에 1955년 라 스칼라에서 비올레타 역을 맡게 되며 성공적인 공연을 했다. 현재 그 실황 음반이 남아있으니 그녀의 음성으로 춘희, 라 트라비아타를 감상하며 앞으로 필 동백꽃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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