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재의 클래식 산책] 유인재 미래도시성장연구소 소장

구스타프 클림트 '환희의 송가' 1902년 作
구스타프 클림트 '환희의 송가' 1902년 作

환영한 적은 없지만 연말은 어김 없이 찾아온다. 벅찬 희망으로 환영하였던 신년은 서둘러 보내야 하는 '송년(送年)'이나 말끔히 잊어야 하는 '망년(忘年)'이 된다. 매년 다양하고 다채롭게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지만, 신년과 송년을 대하는 태도와 기념하는 방식은 아주 다르다. 첫날 일출을 보면서 새해를 맞이하고 마지막 날 베토벤 제9번 교향곡 '합창'을 들으며 한 해를 보내는 것이 대표적이다. 차가운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뜨겁게 솟아오르는 새해 첫 태양을 보면서 좋은 기운과 뜻밖의 행운을 얻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심리는 이해되지만, '합창' 교향곡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 '합창'이 탄생한 유럽에도 없는 연주 전통인 데다 '합창'이 전달하는 '환희'와 송년과 연관된 '망각'이란 의미가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합창'을 송년 음악회의 단골 레퍼토리로 만든 곳은 일본이다. 일본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으로 끌려온 독일군 포로들의 연주를 통해(1918년 6월 1일) '합창'을 처음으로 접했다. 이에 감동한 일본인들이 1943년 12월, 태평양 전쟁에 출전하는 학도병들을 위한 연주회에서 '합창'을 연주하면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전쟁 후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진 교향악단들이 상업적 목적으로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점은 대부분 송년을 기념하는 음악으로 '합창'을 듣는 것에 공감하거나 감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잘 알려진 대로 '합창' 교향곡은 베토벤이 프리드리히 쉴러의 '환희의 송가(1786년)'를 토대로 작곡한 그의 마지막 교향곡이다. 베토벤은 '환희의 송가'를 처음 접하고 곡을 붙이기로 결심한(1793년) 후 사망하기 3년 전인 1824년, 30여 년 만에 '합창'을 완성하였다. 형식과 기법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환희의 마법이 가혹한 관습이 나눠놓았던 자들을 다시 묶고, 모든 사람은 형제가 된다…,우리 모두 황홀감에 취해, 빛이 가득한 성소로 들어가자…, 백만인이여, 서로 껴안으라! 전 세계의 입맞춤을 받으라!"는 열광적이고 도취적인 가사가 전달하고자 하는 '환희의 감정'이 불명확했기 때문이었다. 작곡 전후, 베토벤의 상황은 '환희'와는 거리가 멀었다. 평생 간직하였던 프랑스 혁명의 열기는 나폴레옹의 몰락(1815년)과 함께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고, 대중들은 밝고 가벼운 로시니의 음악에 열광하고 있었으며, 아들처럼 아꼈던 조카의 양육권은 빼앗기고 청각을 완전히 상실하는 등 '환희'를 느낄 수 있는 것이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절망의 심연에 이르러서야 실러가 노래한 '환희'의 의미가 분명해 진 것이다. '절망의 바닥에서 자라나지 않은 것은 진정한 희망이 아니며, 진정한 자유는 모든 희망이 사라진 절망의 바닥에서 찾을 수 있다.'는 여러 시인들의 표현처럼 '환희의 송가'에서의'환희'는 모든 것이 사라진 절망과 좌절의 바닥에서 솟아나는 순수한 '희망'과 순전한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쉴러 역시 봉건제의 모순을 비판한 그의 첫 희곡 <군도(群盜)>가 당국의 간섭으로 흥행에 실패한 후(1782년) 극도의 궁핍과 절망의 시기를 보내던 시점에 '환희의 송가'를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합창'에서 베토벤이 표현한 '환희'가 주는 '희망'은 이전의 베토벤 음악이 전달하는 '희망'과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 베토벤은 '합창' 교향곡 마지막 악장에서 '환희의 송가'를 부르기 직전, 이전 악장의 선율을 다시 들려준 뒤 "오, 벗들이여! 이 선율이 아니고 더욱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지 않겠는가!"라고 노래하면서 자신의 앞선 생각과 성취를 부정한다. 계몽의 빛을 전하는 영웅의 행진(제3번 교향곡)이나 운명을 극복하는 개인의 의지(제5번 교향곡), 또는 투쟁이 끝난 후 전원에서의 휴식(제6번 교향곡)과 같이 이전의 교향곡에서 추구하였던 현재를 희생하고 인내하면서 타인의 의지나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비현실적인 유토피아를 향한 '희망'이 아닌 것이다.

유인재 미래도시성장연구소 소장
유인재 미래도시성장연구소 소장

헤르만 헤세가 "인생이란 모든 의미와 의의가 상실되었을 때 비로소 깊은 의미를 지닌다."라고 말했듯이 절망 가득한 지금, 좌절밖에 없는 현실을 순수한 '환희'로 기꺼이 포옹할 때, 얻을 수 있는 온전하고 진정한 '희망'이자 '자유'인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보다는 현재,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합창은 이상이 허상이 될 때, 희망이 절망으로 변할 때, 어제의 굳은 결심과 벅찬 꿈이 오늘의 사소한 시련 앞에 쓰러지고 흔들릴 때마다 들어야 하는 곡이다. 언제나 우리가 '합창'을 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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