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김종수 건국대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탁영금(濯纓琴)의 명문 부분.
탁영금(濯纓琴)의 명문 부분.

탁영(濯纓) 김일손(1464~1498)은 사관으로 있을 때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기록한 일로 무오사화(1498년) 때 능지처사를 당했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자신이 꾼 꿈을 모티브로 하여 항우가 초나라 의제를 죽인 것을 내용으로 쓴 조문이다. 그 의도가 어쨌든 그냥 문집에 있었으면 아무 탈이 없었을 것인데 이것을 제자인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하고'충분(忠憤)'이란 의견을 달아서 사단이 되었다. 사초는 실록편찬의 기본 자료가 되는 기록이다.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사초를 취합하게 되었는데 실록청 당상인 이극돈 등이 김일손의 사초에서 이 대목을 발견했다. 이것이 연산군에게 보고되었고 왕은 김일손의 사초를 가져오라는 명을 내렸다. 이극돈이 6개 조목을 발췌하여 올렸으나 종실에 관한 내용도 모두 가져오라고 하였다.

김일손의 사초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었을까? 실록의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면, 조의제문 외에도 세조 대의 고승 학조대사가 세종의 8남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와 통정한 사실, 시아버지 세조가 며느리인 덕종의 후궁에게 전답과 가옥을 하사하는 등 유달리 총애하였는데 세조가 이들 며느리에게 흑심이 있었다는 내용 등이었다. 한마디로 왕실의 감추고 싶은 추문들을 적은 것이다. 연산군은 격노하여 김일손을 일러 난신적자가 따로 없다고 했다. 이러한 사초의 기록 외에도 김일손이 문종비 현덕왕후의 복위를 주장한 것도 연계가 되었다.

종합해 보면, 연산군은 김일손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왕실의 추문을 사초에 기록하고 현덕왕후의 복위를 주장한 것 등의 행위는 단종을 동정하고 세조의 왕위 계승과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연산군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역적으로 생각했을 법하다. 이른바 조선시대 최대의 필화사건인 무오사화의 결말은 참혹했다. 김일손은 자신은 물론 처자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김일손은 거문고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직접 연주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 부르고 감상하는 것을 즐겼다. 거문고는 선비의 풍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악기이다. 그것은 거문고가 여흥을 돕는 악기이기 때문이 아니라 거문고 소리로 사람의 성정을 다스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거문고는 명주실을 꼰 여섯 줄로 이루어져 있는 육현(六絃)의 악기이다. 해죽(海竹)으로 만든 술대로 내리쳐 소리를 내는데 맑고 부드러우면서도 투박한 소리가 혼재되어 있어 연주하기 어려운 악기라고 한다. 거문고는 오현(五絃)과 칠현(七絃)이 있었는데 오현은 순임금이 사용했고 칠현은 문왕이 썼는데 진나라 때 칠현금이 고구려에 들어오자 국상 왕산악이 이를 개조하여 여섯 줄의 육현으로 만들어 우리나라에는 6현의 거문고가 사용되고 있었다.

김일손은 거문고를 두 개나 가지고 있었는데, 줄이 여섯인 육현금(六絃琴)은 독서당에 비치하여 두고 줄이 다섯인 오현금(五絃琴)은 집에 두었다. 누군가 육현금은 독서당에 두고 오현금은 집안에 두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김일손은"외양으로는 지금의 것을 따르나 내면으로는 옛것을 따르고자 함이다."(外今內古)"라고 말했다.

<탁영집>에는 김일손의 거문고에 대한 일화가 전해온다. 김일손이 처음에 거문고를 만들려고 했으나 재목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어느 날 동화문 밖의 한 노파의 집에서 재목을 얻게 되었는데, 바로 사립문 설주였다. 노파에게 그 재목이 오래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노파는 대략 100년 정도 되었는데 한쪽 문짝은 부서져 벌써 밥 지을 때 땔감으로 사용했다고 하였다. 거문고를 만들어서 타보니 소리는 맑은데 월(越, 거문고 밑바닥의 구멍)과 빈지에 사립문을 만들었을 때의 못 구멍이 셋이나 있으므로 옛날의 초미금(焦尾琴, 불에 탄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월의 오른쪽에 글자를 새겼다.'만물은 외롭지 않아서 마땅히 짝을 만나게 되지만 백세(百世)의 긴 세월이 멀어지면 필히 만나기도 어렵다네. 아, 이 오동나무는 나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서로가 기다린 것이 아니라면 누굴 위하여 나왔겠는가?'

김종수 건국대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김종수 건국대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현재, 전하는 탁영금에는 구멍이 있고 글자가 새겨져 있다. 김일손이 집에 두고 마음을 다스리며 연주했던 그 거문고가 아닐까. 대쪽 같은 신념과 기개로 사관의 전범을 보여 준 탁영 김일손, 그의 몸은 권력에 의해 무참하게 무너졌으나 그의 올곧은 선비정신은 오늘날에도 탁영금을 통해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

'금(琴)이란 내 마음을 단속(禁)하는 것이니, 걸어두어 소중히 여기는 건 소리 때문만은 아니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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