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눈] 최원영 K-메디치연구소장·전 세광고 교장

"나는 416명의 남자와 928명의 여자, 54명의 죄 없는 아이를 죽였다. 전투에서 죽인 전사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500채의 농가를 불태웠으며, 800명의 처녀를 강간했다. 그렇지만 나는 구원받을 것이다. 단 한 차례도 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으며 신의 말씀을 어긴 적도 없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와 로마가톨릭 간에 벌어졌던 '30년 전쟁'(1618-1648) 당시의 장군 기록이다. 신의 이름으로 어떤 반윤리적인 행위도 정당화된다는 신앙 고백이다. 30년 전쟁은 역사상 가장 잔혹한 참극으로 기록되는 사건이었다. 같은 신을 섬기면서도 교리 상의 차이를 내세워 무차별적인 살상이 이루어졌고,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대륙이 초토화되었다. 전쟁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 톨레랑스, 곧 관용이라는 개념이 유럽사회에 등장했다. 상대의 정치적 의견과 종교의 다양한 가치를 존중한다는 취지가 반영된 것이다.

종교가 인간의 구원과 해방이라는 본연의 가치를 상실하고, 자신들의 종파만 절대적 진리라는 독선에 빠질 때 흉기가 된다. 특히 종교가 민족주의와 결합될 때는 재앙으로 진화한다. 수많은 종교전쟁과 홀로코스트나 아르메니아 학살 같은 포그롬(Pogrom, 대박해)의 역사가 이를 입증한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은 종교와 민족이 결합되면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이다. 예수의 탄신일, 곧 성탄절에도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지면서 '피의 성탄절'이 되고 말았다. 병원이나 요양원 등이 폭격 대상이 되고 노약자와 어린이 피해가 늘면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금도가 사라지고 있다. 우려되는 것은 네타냐후가 이끄는 이스라엘 정부나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모두 강경파라는 점에서 전쟁의 끝은 가늠할 수 없는 형국이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는 학자가 사무엘 헌팅턴(S. huntington)이다. 1996년 하버드대의 정치학 교수였던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이라는 저서를 통해 향후 세계가 문명권과의 갈등 속에서 분쟁이 일어날 것이고, 그 중심에 종교가 자리 잡을 거라고 예견해서 화제를 모았다. 이 주장은 1990년을 기점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로 이념 갈등이 종식되고 평화가 올 것이라는 프랜시스 후쿠야마(F. fukuyama)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문명충돌이론은 문명공존의 가능성을 부인한 점에서 비판받았지만, 2001년 9.11 사태가 일어나면서 주목을 끌었고, 미국과 이라크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각광을 받았다. 최근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헌팅턴의 주장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

'만들어진 신'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R. dawkins)는 인류 역사의 비극이 종교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며 '암(癌)적 존재'라고 비난한다. 단순한 교리 상의 차이로 종파 간에 전쟁을 일삼으며 수많은 비극을 초래한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사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뿌리는 하나다. 여호와를 유일신으로 섬기는 종파의 뿌리가 갈라진 것이다. "우리(이슬람)의 신과 너(기독교)의 신은 같은 한분의 신이시니 우리는 그 분께 순종함이라"라는 코란의 한 구절도 여기서 유래한다. 같은 신을 섬기면서도 서로 적대시하며 전쟁을 불사하고 있는 것이다.

최원영 K-메디치연구소장·전 세광고 교장
최원영 K-메디치연구소장·전 세광고 교장

21세기 최첨단 과학 문명의 시대에도 종교 열기는 시들지 않고 있다. 수많은 갈등과 비극을 초래했으면서도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종교는 언제나 인류와 동행할 것이다. 고등 종교의 가치는 인간의 구원과 해방, 나아가 공동체의 평화에 기여하는데 있다. '유일신'과 '선민사상'으로 무장하고 타종교에 배타적인 태도로 일관할 때, 그것은 광신집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고, 하등종교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종교 공존을 고민하는 문명공동체의 성숙한 자세가 나타나길 기대하며 팔레스타인의 포성이 하루 빨리 멈추길 기원한다.

키워드

#세상의눈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