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백두대간 서쪽에 첫 교두보…임진왜란 때 군량미 창고 활용

편집자

오늘부터 3주 간격으로 조혁연 대기자의 '역사 따라 걷는 산성길'을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번 연재는 지역적으로는 충남북 산성, 시대적으로는 고대~조선을 대상으로 합니다. 기사는 산성의 축성법보다는 각 산성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 과정에서 원문을 풍부히 인용, 독자 이해도를 높이게 됩니다. 사전에 직접 답사로 확보한 산성 트래킹도, 고도 및 속도 그래프 등도 함께 기사화해 독자들의 탐방 준비와 코스 선택을 돕게 됩니다. 뚜벅뚜벅! 역사와 함께 두런두런 걷는 산성길은 건강 다지기와 힐링의 시간도 될 것입니다.

 

 

삼년산성 트래킹도
삼년산성 트래킹도
삼년산성 고도 및 속도 그래프
삼년산성 고도 및 속도 그래프

위치: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일대
출발지: 삼년산성 주차장(보은읍 성주리85)
초축: 470년(신라 자비왕 13)
형태: 계곡을 바구니 형태로 감싼 포곡식
둘레: 1,680m

[중부매일 조혁연 기자]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 영토는 대략 지금의 경상남북도 지역이었다. 신라 영토의 서쪽(지금의 충북 동쪽)으로 백두대간이 지나고 있다. 신라는 『삼국사기』 등의 기록을 보면 최소한 2세기 무렵부터 백두대간에 대해 전략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했다.

삼년산성 스카이뷰 /구글어스
삼년산성 스카이뷰 /구글어스

 

삼년산성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

고대 국가 신라는 백두대간을 돌파해야 국력이 커지고, 삼국 통일을 이룩 수 있다고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병아리가 달걀껍질을 깨고 나와야 성장할 수 있다'는 논리와 같았다.

백두대간을 의식하기 시작한 신라는 156년(아달라왕 3) 첫 고갯길[영로]인 '계립령'을 개척하고, 이를 역사 기록으로 남겼다.

'3년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계립령로(鷄立嶺路)를 개척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계립령은 우리나라 역사 문헌에 등장하는 첫 고갯길로, 지금의 '하늘재'다. 충주시 수안보면과 문경읍 관음리를 연결하고 있다. 2년 후인 158년(아달라왕 5) 신라는 역시 백두대간 단양 죽령(竹嶺)에 제2호 영로를 개척했다.


 

축성 작업에 의외로 선산 주민 3천명 동원

고갯길을 개척했다고 해서 그 주변의 땅을 완전히 자국 영토로 만들었다고 볼 수 없다. 일대를 영속화(永屬化)하고, 주민들로부터 세금·노동력을 수취하기 위해서는 행정과 군사 기능을 겸비한 성(城)을 구축해야 한다.

470년(자비왕 13) 신라는 처음으로 백두대간을 막 넘어선 지역에 산성을 축조했다. 삼국 통일의 첫 교두보를 확보한 셈이다. 오늘 주제인 충북 보은 삼년산성(三年山城)이다.

'13년(470)에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쌓았다. 삼년(三年)이라는 것은 공사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완공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삼국사기』 신라본기>

486년(소지왕 8) 신라는 삼년산성을 보수(補修)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일선계(一善界)의 장정[丁夫] 3천명을 징발해서 삼년성(三年城)과 굴산성(屈山城, 지금의 옥천 이성산성 추정) 두 성을 고쳐 쌓았다'라고 기록했다.

이 대목은 수긍되지 않는 면이 있다. 신라는 삼년산성을 보수하는데 보은지역 백성이 아닌, 멀리 떨어진 일선 장정 3천명을 동원했다. 일선은 지금의 경북 선산이다. 역사가들은 그 배경을 신라가 백두대간을 넘어왔다고는 하나 보은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신라가 그럼에도 백두대간 서쪽에 삼년산성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가 나제동맹 정신에 따라 산성 축조를 묵인했기 때문이었다. 삼년산성 축조는 백제 입장에서 보면 대고구려 대항력의 증가를 의미했다.

역사에는 영원한 우방도 적도 없다. 554년 옥천 구진벼루(군서면 월전리 306)에서 백제 성왕의 목을 벤 신라 인물은 삼년산성에서 긴급 출동한 고간(高干) 도도(都刀)였다. 이 부분은 옥천 관산성 편에서 자세히 다룰 계획이다.
 

삼년산성, 역사적 재활용율 가장 높았다


삼년산성은 강고(强固)하게 축성됐기 때문에 신라하대~조선시대에도 자주 '역사의 현장'이 됐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 사비성을 함락한 후 당 고종이 신라 태종무열왕에게 조서(詔書, 황제의 문서)를 전달하는 의식을 삼년산성에서 가졌다. 이날 전달식은 신라가 당나라 중심의 책봉과 조공체제에 편입됐음을 선포하는 의식이었다.

신라가 조서 전달식을 굳이 삼년산성에서 가진 것은 산성의 견고함과 높이를 당나라에 과시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이날 고대 외교사에서 보기 드문 사건이 일어났다. 당나라 고종을 대리해 조서 전달자로 웅진도독 왕문도(王文度)가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돌연사했다.

28일에 왕문도가 삼년산성에 이르러서 조서(詔書)를 전달하였는데, 문도는 동쪽을 향하여 서고, 대왕은 서쪽을 향하여 섰다. 칙명(勅命)을 내린 후에 문도가 당나라 황제의 예물을 주려고 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곧바로 죽었으므로 그를 따라 온 사람이 대신하여 일을 마쳤다.-<『삼국사기』 태종무열왕 7년 9월 28일>

신라 하대에 들어서면서 마치 농구 리바운드 싸움과 같은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김헌창(金憲昌, ?~822)의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은 왕위계승 후보 1순위였으나, 진골 김경신(金敬信, 후에 원성왕)에 밀려 보위에 오르지 못했다.

822년(헌덕왕 14) 김헌창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신라의 9주 5소경 가운데 4주 3소경을 장악할 정도로 수도 경주를 위협했다. 그해 김헌창 반란군과 신라 정부군 사이의 최후 일전이 삼년산성에서 벌어졌다. 김헌창은 패배했고 삼년산성 안에서 자결했다.

'위공과 제릉은 장웅 군대에 합류하여 삼년산성을 공격해 들어가 이겼다. (중략) 헌창이 겨우 몸을 피하여 성안에 들어가 수비를 견고히 하자, 여러 군대가 성을 포위하여 공격한 지 10일 만에 성이 막 함락되려 하였다. 헌창이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자, 종자(從者)가 목을 베어 머리와 몸을 각각 다른 곳에 묻었다. 성이 함락되자 오래된 무덤에 있던 그의 시신을 찾아내 다시 처단하고, 친척과 따르던 무리 모두 239명을 죽였으며, 그 백성들은 풀어 주었다.'-<『삼국사기』 헌덕왕 14년 3월 18일>

928년 후삼국시대 양웅인 왕건(王建, 877~943)과 견훤(甄萱, 867~936)의 공방이 삼년산성에서 벌어졌다. 왕건이 삼년산성을 지키고 있던 견훤을 공격했으나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청주로 퇴각했다.

조선시대 삼년산성은 임진왜란 때 군량미 창고로 재활용됐다. 당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선조에게 "충청도는 조금은 두서(頭緖)가 있으니 괜찮을 듯합니다. 병사(兵使) 이시언(李時言)이 삼년성(三年城)을 지키고자 하여 이미 그곳에다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옮겼다고 합니다. 삼년성의 길은 황간·영동과 접해 있어 적의 길을 차단할 수가 있습니다(『선조실록』 30년 1월 27일)"라고 보고했다.
 

삼년산성의 눈여겨볼 축성공법

삼년산성 서문(정문)의 3중 방어구도. /드론 촬영
삼년산성 서문(정문)의 3중 방어구도. /드론 촬영

◇3중 방어구조

삼년산성은 곡성(曲城, 곡선으로 쌓은 성벽)을 일정한 간격이 아닌, 꺾이는 지점에 반원형으로 축조했다. 특히 봉우리 부분의 곡성은 규모가 크고 다른 곳보다 튀어나와 있어 돈대(墩臺, 보루의 일종)의 기능도 지녔다.

삼년산성 서문은 유난히 안쪽으로 들어온 형식으로 축조, ①~③의 효과를 발휘토록 했다. ①적이 성벽에 접근할 경우 좌우 곡성에서 화살 공격을 하게 된다. ②정문격인 서문에는 2차 방어벽이 구축돼 있다. ③설령 적이 정문 성격의 서문을 돌파했다고 해도 아미지 연못과 암벽 단애가 길목을 이룬 공간을 만나게 된다. 신라군은 암벽 위에서 다시 화살 공격을 퍼붓게 된다.(이상 사진 참조) 암벽 단애에는 아미지(蛾眉池), 옥필(玉筆), 유사암(有似巖) 한자가 새겨져 있다.

◇여느 산성과 달리 밖으로 열어젖히는 성문

삼년산성 서문지에 도달해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문지방돌을 만날 수 있다. 놀랍게도 문지방돌 위에는 너비 1.66m의 수레바퀴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수레가 쉼 없이 넘나들었는지 겉면이 반질반질하다. 이 정도의 너비이면 꽤 큰 수레다. 태종무열왕, 당나라 웅진도독 왕문도, 진골 김헌창, 후백제를 세운 견훤 등도 이 문지방돌을 넘나들었을 것이다. 여느 산성과 달리 성문 문틀을 바깥으로 내밀어 여는 방식도 특이하다.

◇석누조 기능을 지닌 바깥 수구

동문지 주변의 수구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이 수구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특이한 공법을 접하게 된다, 수구 바깥쪽 밑바닥 돌은 성벽보다 약간 더 튀어나와 낙수가 성벽을 타고 흘러내리지 않고 폭포처럼 바로 땅으로 떨어지게 했다. 땅바닥에는 돌멩이를 깔아서 패어나가지 않게 조치했다. 이는 문루의 석누조(石漏槽) 돌출을 연상케 한다. 석누조는 빗물이 벽을 타고 흐르는 것을 방지한다.

◇탐방후기

삼년산성은 하늘과 맞닿은 둘레 능선이 아름답다. 전체적으로 벌어진 조개껍질 모습이다. 그 능선은 아미지 연못을 만든 계곡부를 원을 그리며 포근히 감싸고 있다. 트래킹은 정문(서문지)에서 우측으로 시작하는 것이 발품이 다소 적게 든다. 좌측 코스는 짧지만 경사도가 매우 가파른 편이다. 트래킹을 시작하면 가깝게는 바둑판처럼 잘 정리된 보은평야, 멀게는 S자로 굽이친 속리산 말티고개가 시야에 들어온다. 삼년산성 안에는 보은군이 소유·관리하는 '보은사'라는 공영(公營) 사찰이 자리잡고 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독경음은 트래킹 후의 땀에 젖은 몸을 소리로 마사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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