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송문용 충남·내포 취재본부장

〔중부매일 송문용 기자〕요즘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으로 주목받는 고려왕이 현종이다.

그는 1010년 말 거란 2차 침입으로 개성을 떠나 피난길에 나섰다. 왕위에 오른 지 1년 여 만에 겪는 고난이다. 지방 아전에게 호위병이 병장기를 빼앗기지 않나, 무뢰배들은 현종에게 활을 쏘는 적대행위까지 했다.

현종이 천안 직산을 통과할 때였다. 가까운 성거산 천흥사는 그가 즉위하자마자 최고 장인을 시켜 아름다운 국보 동종을 만들어 선물한 곳이다. 현종은 태조 왕건의 손자다. 천안은 930년 할아버지 태조가 만든 신도시로, 여기를 기반으로 후삼국을 통일했다.

또 어머니(헌정왕후)의 외할아버지 황보제공은 천안시장격인 첫 천안도독부사였다. 아무리 황망한 피난길이지만 천안을 지나면서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다.

현종이 밭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기구한 어린 시절이 떠올랐으리라. 이 때 충신 지채문이 나섰다. 말을 달려 기러기가 놀라 날게 한 뒤 활로 쏴 떨어뜨렸다. 그리고 "신하 중에 저 같은 사람이 있사온대 어찌 도적들(거란군)을 걱정하십니까" 말하니, 왕이 크게 기뻐했다.

그로부터 6년 후 비운에 살다 간 부모를 위한 절을 천안에 짓기 시작했다. 절 이름 홍경사 앞에 부모를 받든다는 뜻으로 봉선(奉先)을 붙였다. 부모 명복을 비는 사찰, 즉 원찰(願刹) 자리로 천안 성환을 정한 것이다.

홍경사터에는 사찰 조성 내용이 기록된 국보 비석이 서 있다. 후일 해동공자로 불리는 최충(984~1068)이 지은 비문에 "직산현 성환역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릴만한 거리에 사찰을 짓는 … 이곳에는 사람들 자취는 보이지 않았고, 갈대가 우거진 늪이 있어 강도와 도적들만 많았다"고 했다. 그래서 나그네들이 안심하고 쉬어 가도록 여관시설(광연통화원)도 지었다.

사찰 건립의 가장 큰 이유는 천안과 고려 왕실의 깊은 연고 때문이었다. 후삼국 통일의 군사교두보 도시이고 태조가 11번째 왕후인 천안부원부인을 맞이한 곳이다.

태자 무(武: 혜종)는 936년 6월 왕건의 심복 박술희와 함께 먼저 내려와,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을 모았다. 아버지 왕건이 거느리고 올 수만명 본진을 맞을 채비를 했다. 현종 당시 천안에는 왕건 초상화가 모셔진 태조 사당과 왕자성·고정(鼓庭, 연병장) 등 통일전쟁 유적이 그대로 있었을 것이다.

이런 연고로 현종은 천안에 200칸이 넘는 대사찰 홍경사를 지은 것이다. 그런데 홍경사 착공 2년 만에 또 거란군이 침략해왔다. 1018년의 3차 침입이다. 강감찬이 소배압 10만명 거란군을 흥화진에서 대파했다. 부장으로 같이 출전했던 강민첨(963~1021)은 승전 후 현종 명령으로 홍경사 건립 책임자가 됐다.

현종은 공사기간 중 거란군 침입을 받는 역경 속에서도 끝내 홍경사를 완공시켰다. 전쟁 영웅 강민첨까지 곧바로 사찰 공사에 투입했다. 또 42세의 떠오르는 문신 최충을 시켜 건립기념 비문을 짓게 했다.

송문용 충남·내포 취재본부장
송문용 충남·내포 취재본부장

천안과 관련된 국보는 3가지가 있다. 그 중 2개, 즉 천흥사종(鐘)과 홍경사비(碑) 모두 고려 현종이 만든 것이다. 현종은 결국 천안에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높은 국보 2개를 선사한 셈이다.

이것도 천안이라는 도시를 만든 태조 왕건과 함께 현종을 천안이 기억해야 할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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