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경찰서 주차장에서 먼저 도착해 있던 의뢰인을 만났다. 멀리서 봐도 불안해 보인다. 그의 움츠러진 어깨와 팔자로 처진 눈썹에서 그의 심리상태를 읽을 수 있었다. 긴장감은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떨지 말라고 다독이며 조사시 주의사항을 설명하면서 나도 긴장을 풀었다.

누가 보면 영락없이 경찰조사를 앞둔 범죄자 같다. 하지만 오늘 의뢰인은 피해자다. 의뢰인은 지인에게 속아 돈을 빌려줬다가 피해를 입고 그 사기꾼을 고소했다. 의뢰인은 가해자를 조사하지 않고 고소한 사람을 먼저 부르는 것은 무언가 좋지 않은 징조가 아니냐고 묻는다.

원래 고소를 하면 고소 내용을 명확히 확인하고 미리 범죄혐의 입증에 필요한 증거를 얻기 위해 고소인을 먼저 조사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사실을 재차 설명해 주었다.

경찰서 앞에서 범죄자들이 주눅 드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실상은 범죄자는 물론이고 범죄자를 고소한 피해자 역시 긴장한다. 경찰서 출입이 일상인 나조차도 경찰서에 들어가면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는다. 다만, 나의 긴장이 의뢰인에게 전해 질까봐 짐짓 태연스럽게 행동할 뿐이다. 어쩌면 그런 연기를 자연스럽게 소화하기 위해 당사자들보다 더 많이 긴장하기도 한다.

심지어 경찰관서의 요청으로 사건 사고에 휘말린 경찰들을 징계하러 간다거나, 각종 정책 사안에 대한 심의나 신규채용인력 면접평가를 위해 초빙된 외부 위원 자격으로 방문할 때도 단지 내가 경찰건물 내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하물며 피해자든 가해자든 본인의 형사사건과 연관된 일로 경찰서를 찾는 일반인들이 느끼는 심리적 위축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경찰서가 주는 심리적 압박감의 근원에 대하여 생각해 본적이 있다. 수사기관은 진실을 원하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건물이 효율적인 진실의 방이 되기를 원한다. 방마다 마동석 형사같은 절대적 압박의 상징을 배치할 수도 없기에 수사기관 건물 자체의 위압감은 효율적인 진실의 방을 조성하기 위한 필수요소 일지도 모르겠다.

단순한 민원인은 경찰서 옆 민원실로 자유로이 다닐 수 있다. 하지만 사건 조사와 관련한 출입시에는 먼저 청사 외부정문에서 방문증을 수령하여 2중 3중의 출입인증을 거쳐야 한다. 내부로 들어가고 나서도 각 과별 사무실 출입을 위해서는 굳게 잠긴 자동문의 센서를 통해 인증을 받거나 누군가 안에서 나와 개방해 주어야 한다. 이런 엄격한 출입통제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어야 그곳에서 다시 나올 수 있다'는 엄포를 듣는 느낌을 준다.

의뢰인과 나는 수차례 검증 절차를 거치고 나서야 담당 수사관 앞에 앉을 수 있었다. 다행히 위압감의 화신 마동석 형사 대신 친절하고 유능한 여자 형사를 만났다. 수사관은 능숙하게 필요한 내용을 확인하고 빠른 시간에 조사를 진행했다. 당연한 업무처리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몇 해 전 사기꾼을 고소한 피해자를 범죄자라도 된 것처럼 다그치는 경관을 만났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사기피해자의 고소대리업무를 수행하면서 경험한 형사는 독특한 사람이었다. 대면 직후부터 이미 짜증 섞인 억양과 표정으로 사건에 대한 편견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조사를 시작하자 슬슬 분노조절 게이지를 높이더니 '민사로 풀지 왜 경찰까지 끌어 들이냐', '확실한 증거를 가져와봐라'는 투로 고소인을 다그쳤다.

수차례 그의 부적절한 태도를 지적했음에도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진실의 방이 주는 위압감에 의지하여 수사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지배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즉시 청문감사관실에 담당자의 부적절한 태도를 알렸다. 담당자가 교체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변호사의 조력이 없었다면 의뢰인은 부당한 수사의 또다른 피해자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토마스 홉스는 국가를 심해괴수 리바이어던에 비유했다. 리바이어던이 인간들의 자만과 교만을 압도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을 가졌기에 사람들을 복종시킬 수 있는 강력한 존재인 국가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계약으로 만들어진 국가는 본질적으로 인권의 보호자이자 잠재적 침해자다. 리바이어던은 진실의 방에 살고 있다.

검찰청의 위압감은 경찰의 그것에 비해 좀 더 노골적이다. 수사과정에서 검사를 만나기 위해서는 1층 로비를 지나야 한다. 로비는 공항검색대 수준의 각종 센서가 설치된 출입문으로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검사실로 들어가려면 건물 정중앙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타야한다.

담당 검사실이 있는 층에 도착하여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양쪽에 똑같이 생긴 자동문이 있는 좁은 공간이 나온다. 당연히 자동문은 보안카드로 굳게 닫혀있다. 공간이 좁은 탓에 자동문이 닫힐 때 '드르르륵'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한쪽 문을 통과하고 나면 역시 대칭구조의 좁고 기다란 복도가 좌우로 펼쳐져 있다. 저 멀리 그 양쪽 끝에 조그맣게 창문이 보인다. 반대편 문으로 들어가도 마찬가지 광경이다. 공간의 촘촘한 분할과 연속되는 대칭구조는 사람 심리를 압박하는 효과를 의도한 것이다.

적어도 내 경험상 검찰청 수사관이나 검사는 전에 만났던 빌런 형사처럼 막나가는 경우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이 압박감을 강하게 느끼도록 의도된 건물 설계는 한 여름에도 고드름이 생길 것 같은 검찰청 특유의 냉랭한 분위기와 어우러져 방문객들을 이미 움츠러들게 만들기 때문에 별도로 인위적인 압박을 추가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인 듯하다. 조사실 공기는 검사나 수사관이 아무리 친절해도 잡아놓은 먹잇감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사자로 보이게 만들만큼 충분히 무겁다. 검찰청 건물은 그 자체로 거대한 진실의 방이 되어버린다.

권택인 변호사
권택인 변호사

수사기관의 진실의 방은 영화 속 유머코드였다. 하지만 현실에서 진실의 방은 심해괴수 리바이어던으로 묘사되는 국가의 위압감을 개인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외로운 전쟁터다.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수사효율과 인권이 적절한 균형을 이뤄야 하지만 아직 수사기관 구성원의 성숙은 진행형이고 인권 감수성은 회색에 머물러 있다. 그 외로운 대결의 장에서 리바이어던에 맞서 균형을 도모하는 일이 변호사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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