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자 아내·며느리·어머니' 독립운동 주체로 역사에 기록

편집자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독립국을 선언했던 1919년 3월 1일을 기념하는 3·1절이 올해로 제105주년을 맞이했다. 암울한 시절 오직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이들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역사 속에 스러져갔다. 더욱이 남녀차별이 심했던 시절의 여성독립운동가는 이제서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위해 조명되기 시작했을 뿐이다. 지난 2020년 8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목련로 27에 위치한 '충북미래여성플라자' 건물 1층에는 충북 연고가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 10명을 기리는 전시실이 마련됐다. 충북여성재단은 당시 200여페이지 분량의 '충북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과 활동-사료편'을 통해 100여년간 소홀히 다뤄졌던 충북의 여성독립운동가를 적극적으로 발굴했다.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자, 아내, 며느리, 어머니, 독립운동 주체로서 역사에 분명히 존재했던 그들의 발자취를 통해 삼일절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기념사진(1940).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기념사진(1940). 

[중부매일 박은지 기자]3·1운동은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데에 남녀가 따로 있지 않다'는 명제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여성들은 3·1운동의 물결에 합류하고 주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거리와 장터로 쏟아졌다. 여학교 소녀들부터 간호사들, 종가의 며느리들과 신앙심 깊은 부인들, 사회적으로 천대받은 기녀들까지 합류하며 여성들이 정치적 주체로 참여했다.

충북의 10명의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출생연도, 운동계열, 훈격, 출신지, 활동상을 살펴보면 다방면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한 것으로 나타났다.

#윤희순(1860~1935 /의병운동/ 애족장 / 충주)

윤희순 / 충북여성재단
윤희순 / 충북여성재단

충북 출신 10명의 여성독립운동가를 출생연도별로 꼽으면 1860년에 태어난 윤희순이 1순위가 된다. 그는 강원도 춘천출생이지만 충주 출신 남편 류제원의 호적에 등재돼 충북 인물로 국가보훈처에서 분류하고 있다. 시아버지는 의병장 류홍석이고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안사람 의병가', '의병군가', '병정가' 등을 작사·작곡해 여성들의 항일독립정신을 고취시킨 인물이다. 남성들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동안 향촌을 돌며 군자금을 모으고 여성의병대를 조직하거나 남장을 해 정보수집에 나서는 등 항일의병 운동을 전개하며 뚜렷한 존재감을 나타냈다. 윤희순의 아들은 독립운동가 유돈상으로 일제 고문으로 순국했으며 윤희순은 그가 순국한지 11일만에 눈을 감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건해(1894~1963 / 중국방면 운동/ 애족장/ 미상(청주)

오건해 / 충북여성재단
오건해 / 충북여성재단

'독립운동가 치고 오건해 여사의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음식 솜씨가 좋고,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에 평생을 보낸 분'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특히 '임시정부 수호자' 김구가 1938년 5월 6일 '남목청사건'때 총격을 당해 사경을 헤맬 때 식사 등 봉양을 맡아 보살핀 것으로 유명하다. 1940년 6월 17일 충칭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이 창립되자 이에 참가하고 한국독립당원으로 활동했다. 남편 신건식, 딸 신순호, 사위 박영준, 시아주버니 신규식, 시조카 신형호, 사돈 박찬익 모두 독립운동가다.

#임수명(1894~1924 / 의열투쟁 운동 / 애국장 / 진천)

임수명 / 충북여성재단
임수명 / 충북여성재단

진천사람으로 1912년 서울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중 일본순경에 쫓겨 환자로 위장 입원한 신팔균과 연을 맺어 결혼했다. 신팔균의 신흥무관학교 독립군 양성 활동,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으로서의 항일독립전쟁 활동 등을 측면에서 지원했다. 주변 동지들의 강한 권유로 1924년 귀국했으나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극도의 가난에 시달렸다. 신팔균의 친척인 신현익이 둘째 아들을 대신 길러주고, 일부 생활비를 보조했지만 이제 막 태어난 딸과 아들들을 키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제 막 세 살이 된 셋째 아들 신현길마저 요절해 버리는 비극을 겪었다. 뿐만 아니라 1924년 2월 남편이 독립군의 훈련을 지휘하고 있던 중 대규모 중국 마적의 습격을 받아 교전 중 전사하자 귀국 후 딸 이영과 자결해 생을 마쳤다.

#신창희(1906~1990 / 중국방면 운동 / 건국포장 / 청주)

청주 가덕면 인차리에서 임시정부 초대 법무총장이자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을 역임한 신규식과 조정완의 딸로 태어났다. 신순호와 사촌간이며 상하이로 망명해 1920년 아버지 비서 민필호와 결혼했다. 민필호는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의 비서, 김구 주석의 판공실장 겸 외무차장 등을 역임하는 한편 동포들에 대한 교육·선전사업에도 헌신했다. 1940년 1940년 임시정부 내 통합당인 한국독립당이 출범하자 신창희는 남편과 함께 제1구 위원으로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임시정부의 여성 동지들과 함께 임시정부의 요인들의 식사 등 살림을 도맡아 이들이 독립운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민인숙(1912 ~ ? / 학생운동 / 대통령표창 / 음성)

민인숙 / 충북여성재단
민인숙 / 충북여성재단

민인숙은 음성에서 태어나 경성 근화여학교를 다녀 집안이 유복하고 총명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충북 여성독립운동가 중 한명인 민금봉과 마찬가지로 근화여학교 4학년 재학 중, 경성의 여학생들이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대한 동조시위를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 적극 동참했다. 이에 1930년 1월 15일 10시 30분 근화여학교 운동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구류 20일 처분을 받았다. 1939년 10월 태창직물회사에서 1년 이상 여성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야학 강좌를 열고 적색노조반을 조직해 활동하다 체포됐다.

#홍금자(1912~? / 학생운동 / 대통령 표창 / 충주)

1912년 충주 살미동 문화리에서 태어났다. 1930년 서울소재 사립태화여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동조하는 만세시위를 벌이자는 경성지역 여학생들의 계획에 찬성했다. 1930년 1월 15일 서울시내 각 학교 여학생들은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지지하고, 일제의 탄압을 비판하는 만세시위를 벌였다. 당시 태화여학교에서는 전교생 103명 중 20명이 운동에 참가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곧바로 일제에 체포되었다. 홍금자 역시 종로경찰서로 압송돼 20일 간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그는 유년의 행적, 출옥 이후 행적 등 사료가 전무하다.

#민금봉(1913~? / 학생운동 / 대통령표창 / 청주)

1913년 1월 7일 충북 청주에서 민영덕(閔泳德)의 딸로 태어났다. 유년시절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일본 경찰자료에 '중류층' 집안의 자제로 파악된 사실이 있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경성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1930년 1월 '경성 시내 여학생 만세소요 사건'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29년 11월 일제의 민족 차별과 억압정책에 반발해 광주의 학생들이 시위를 일으키자, 경성의 여학생들은 이 운동에 동조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이화여고보 3학년생이었던 민금봉은 이 계획에 적극 찬성했다.

#박재복(1918~1998 / 국내항일 / 애족장 / 영동)

박재복 / 충북여성재단
박재복 / 충북여성재단

박재복은 영동 출신으로 빈농집안에서 태어나 20살이 되자마자 보다 안정적인 돈벌이를 위해 군시제사주식회사(郡是製絲株式會社) 대전공장의 여공으로 취직했다. 누에 실 생산·가공 업체인 군시제사주식회사는 전범기업 미쯔이(三井)가 세운 것으로, 조선인 차별 대우는 물론 노동력 착취가 극심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이런 곳에서 일하며 박재복은 자연스레 항일의식을 키우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매일같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승리할 것이라는 세뇌 교육을 받았다. 박재복은 매일 밤 조선인 여공들을 기숙사 한 편에 모아 일제의 선전은 새빨간 거짓이며, "일본은 곧 패전할 것"이니 결코 독립의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격려해주었다. 그러다 이 사실이 일본경찰의 감시망에 포착돼 1년여 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국영(1921~1956 / 임시정부 / 애족장 / 청주)

이국영 / 충북여성재단
이국영 / 충북여성재단

청주 출신으로 부친은 신민회와 신흥무관학교,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광, 어머니는 이광과 함께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김수현이다. 남편은 1938년 당시 광복군이었던 민영구다. 1941년 6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이 조직되자 가입해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항일운동을 펼쳤다. 1941년 10월 10일 충칭에서 3·1유치원이 설립되자 연미당, 정정화 등과 함께 교사가 되어 교민의 자제를 교육했다. 1944년 3월에는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생계부 부원에 임명되어 활동했다.

#신순호(1922~2009 / 광복군 / 애국장 / 청주)

오건해, 신순호, 박영준 가족사진 모습. / 충북여성재단
오건해, 신순호, 박영준 가족사진 모습. / 충북여성재단

신순호는 1922년 1월 충북 청원(현재 청주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912년 이래 줄곧 독립운동에 헌신, 임시정부 재무부 차장 등 요직을 역임한 신건식이다. 어머니는 임시정부의 살림을 책임지는 한편,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창설해 독립운동을 실천한 오건해다. 이러한 부모의 배경으로 말미암아 신순호는 5살 때 어머니와 상하이로 건너간 뒤 줄곧 임시정부 요원들과 함께 지내게 됐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항일 의식을 키울 수 있었다.그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16세 무렵부터였다. 1937년 9월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제의 중국침략이 가속화되자 그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했다. 이후 그는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이 정식 출범하자 여군으로 입대해 활동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그는 임시정부의 여러 부서에 소속돼 활약했다. 1942년 5월 임시정부 생계부 생활위원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 식구들의 의식주를 책임졌다. 광복 직전에는 외무부 정보과에 소속되어 각종 첩보를 수집, 항일운동에 일조했다.
 

충북 출신 여성독립운동가 10명은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본적이 충북으로 등재된 분들이다. 이들 이외에 본인 출생지, 남편 본적 등을 종합해 다시 논의돼야 할 여성독립운동가는 1940년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에 참여한 김수현, 조선총독부의원 간호사 출신으로 간우회를 조직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지원한 신채호의 아내 박자혜, 광복군에 입대해 포로 심문을 통해 정보수집과 선전활동을 펼친 신정숙, 기독교 전도사로 독립선언서를 거리에 배포하고 유관순과 옥중항거를 단행했던 어윤희, 한인여자청년동맹 임시위원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요인 수행활동을 펼친 연미당, 대한적십자회 상의원, 통합임시정부 국무원 참사, 애국부인회 회장으로 활동했던 이화숙 등 6명이 더 있다.

충북 여성독립운동가 전시실 전경. / 박은지
충북 여성독립운동가 전시실 전경. / 박은지

충북 여성독립운동가 전시실 문화해설사로 활동중인 이미희씨는 "역사에 관심있는 학생들부터 독립운동가 유족분들 등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은 방문으로 이어지고 있다"면서 "다만 반짝관심으로 그치지 말고 충청지역을 비롯해 전국에 알려져 100여년 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신 여성독립운동가 분들이 계셨다는 사실을 더 많은 분들이 기억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순덕 충북여성살림연대 대표는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았으나 아직도 여성독립운동가는 유관순만 기억되는 게 현실" 이라면서 "충북 여성독립운동가 발굴 등 사업이 활성화될려면 지속적인 관심과 함께 민관이 협력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방안들이 더 논의돼야 한다"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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