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9일 첫 전개 청년층 주도
사망 99·부상 210·수감 157명

청주시 삼일공원에 설치된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조형물. /중부매일DB
청주시 삼일공원에 설치된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조형물. /중부매일DB

[중부매일 이성현 기자]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된 3·1운동이 올해로 105주년을 맞는다.

각계각층을 망라해 전개된 3·1운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발판과 일제의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꾸는 계기로 이어졌던 만큼 독립운동사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특히 충북은 3·1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역 중 하나다.

대표적으로 1919년 3월 1일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포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대표 33인 중 6명(손병희·권동진·권병덕·신석구·신홍식·정춘수)은 충북 출신이다.

충북 사학자들의 자료에 따르면 충북은 다른 지역보다 늦게 3·1운동이 전개됐다.

1919년 3월 2일 천도교 측 인종익이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기 위해 청주천도교구실에 도착했으나 일본 군경에게 체포됐기 때문이다.

충북 최초의 만세함성은 3월 19일 괴산 장터에서 울려퍼졌다. 최다 인원인 6천여 명이 참가한 지역이기도 하다. 경술국치로 순국한 홍범식의 아들 홍명희가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홍명희는 고종황제 인산을 위해 상경했다가 손병희를 만나 귀향한 뒤 즉시 동지들과 협의해 만세시위를 추진했다.

옥천은 충북 도내에서 가장 치열하게 3·1운동이 전개된 곳으로 평가받는다.

3월 27일 이원 장터에서 허상구·허상기·허상희·육창주·공재익·조이남·이금봉·이호영·김용이 등 9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이 도화선이 됐다.

장터 만세운동에는 600명이 넘는 군중들이 시위에 나섰지만 일본 헌병들이 총칼로 제압한 탓에 시위자 2명이 순국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조선헌병대사령부는 옥천 시위를 '폭행 시위의 효시'라고 보고했다.

영동군에서는 3월 30일 학산면 경찰관 주재소에 200여 명의 주민들이 돌을 던지고 안으로 들이닥쳐 격렬한 시위를 펼쳤다.

이후 4월 2일부터 6일까지 진행된 매곡 만세운동도 영동에서 전개됐다. 당시 독립선언서를 뒤늦게 입수한 안준은 400여 장의 태극기와 필사한 독립선언서를 들고 면사무소를 습격했다. 군중들도 합세했지만 일제가 주동인물을 구속하자 이에 격분한 군중들이 추풍령까지 추격해 불을 질러 태워 버리기도 했다.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영동 출신 독립유공자 64명 가운데 58%인 37명이 3·1운동계열"이라며 "독립유공자 가운데 3·1운동계열이 차지하는 비율은 도내 11개 시·군에서 가장 높다"고 밝힌 바 있다.

청주에서는 3월 30일 군내 최대 만세운동이 미원장터에서 발생했다. 이날은 미원 장날로 1천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쳤고, 주도자가 연행되자 분노한 군중들이 주재소로 몰려가 유리창을 부수는 등의 항쟁을 이어갔다. 민족대표 33인 중 손병희·권병덕·신석구·신홍식·정춘수는 청주가 고향이다.

음성군 대표적인 항쟁은 4월 1일 소이면 장터에서 전개됐다. 200여 명의 군중이 만세 시위를 벌이다 일제의 발포로 다수의 순국자가 발생했다.

진천군은 3월 15일 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 계획이 적발돼 불발로 그칠 뻔했으나 다음달 2일 군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이월면 장양에서는 200여 명의 주민이 헌병주재소를 내습했고, 헌병들이 무력진압에 나서자 해산됐다.

충주에서는 4월 1일 신니면 용원 장날에 500여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운동을 펼쳤다.

제천에서는 4월 17일 1천여 명의 군중이 장터에서 미리 제작한 태극기를 펄럭이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이튿날 긴급 출동한 헌병들에 의해 해산됐다.

충북지역 3·1운동은 타 지역보다 늦게 전개됐으나 격렬한 시위가 지구적으로 펼쳐졌고, 청년층이 항쟁을 주도했다는 성격을 띈다.

충북학연구소가 발간한 '충북 3·1운동, 그 기억과 기념' 자료에 따르면 도내 3·1운동으로 인한 사망자는 99명, 부상자 210명, 수감자 157명으로 집계됐다.

아울러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제에게 붙잡힌 139명의 연령별 분포는 20대가 61명(44%)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30대 31명(29%), 40대 19명(13.7%), 10대 11명(8%) 순이다.

도내 청년들이 펼친 3·1운동은 1920~1930년대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실제 3·1운동 이후 청주·괴산·영동 등 각지에서 청년회가 조직됐으며, 이들은 신간회, 농민·노동운동을 전개하며 민족운동을 선도했다.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 알려진 충주 출신 류자명은 3·1운동 당시 31살의 나이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활동을 펼쳤다.

이밖에도 곽중규, 황학수, 유석현, 이우민, 남상렬, 정주해, 한병호 등도 모두 충북 3·1운동에 참여해 아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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