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눈] 김현진 청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연말정산 과정에서 아버지의 의료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보험 가입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아 9개월간 식도암 수술 및 치료비용이 7천만 원 가까이 들었다. 자식들이 때마다 갹출해서 비용을 부담하고 동네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지은 농사 수매 비용이 모두 사용되었다. 불현듯 자식을 많이 낳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가 싶고 어려움을 나누는 가족이 있음에 감사했다.

아직 회복되지 않으셨으니 올해도 여전히 이만큼의 지출이 예상된다면 큰일이다. 간병비까지 부담하면 평균 한 달에 천 만 원이 훌쩍 넘는 돈이 필요하다. 겨우 몇 마지기의 논과 소작으로 평생을 살아온 촌부에게 그만한 돈이 있을 리 없다. 그나마 있는 땅과 집을 처분해야 한다. 이런 상황을 아는 지인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평생 벌어서 의료비에 다 쓰고 가는 거라고. 흘려듣던 그 말이 현실이 되니 착 와닿는다.

아버지는 늙어서 아픈 몸을 치료할 돈을 마련하느라 평생을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나 보다. 없는 살림에 유난히 험한 삶을 살았을 아버지의 생애가 눈앞에 그려진다. 그래도 낫기만 하면 좋으련만 이미 사라진 근육은 회복이 더디기만 하다. 의료제도가 어떻다, 건강보험이 어떻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환자가 많았던 집안 사정상 우리 가족은 건강보험 혜택을 많이 받아왔으니 사회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서 건강보험료를 올린다거나 하는 일에 반대하지 않는다. 충실히 사회의 뜻에 따를 것이다.

노인복지관에서 강의 요청이 있어 준비하다 보니 아버지 사연을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규보 교수(지식인사이드)는 젊어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돈 때문에 건강을 해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돈을 벌 이유가 없다는 말에 공감했지만 여든이 넘은 선배 시민의 말대로 살기가 어렵다. 아직은 돈 들 데가 많고 올해는 아버지 치료비도 벌어야 하니 말이다.

이렇게 삶은 늘 딜레마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 오늘도 건강에 이롭지 않은 선택을 몇 번이고 했다. 책임도 아니면서 계획서를 맡아서 쓰겠다고 하고, 무엇이든 도울 테니 연락하라 하고, 자문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달려가겠다며 일을 벌여 놓았다. 돈 때문이 아니라 즐거워서 하는 거라 늘 자부하지만 결국 나는 입금이 되면 더 기쁜 마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 일을 찾아 나설 것이다.

사실 나의 꿈은 장수하는 것이다. 한때는 그 기운을 담아 온갖 비밀번호를 9988로 해놓기도 했었다. 99세까지 88하게 살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아서. 단순한 장수가 아니라 좋은 어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은 비밀번호를 모두 바꾸어놓았다. 이건 비밀로 해두려 한다. 비밀번호니까. 이 교수님의 강의 중에 마음이 닿은 다른 하나는 가족이 환영하는 노년을 위해서 경제적 안정과 관계를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데 새벽 2시에 전화를 걸어도 별일 없을 친구, 만 원 한 장만 가지고도 만날 수 있는 친구, 돈 없어도 즐길 수 있는 친구를 5명 이상 두라 했다.

경제적 안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씀에 동의한다. 그런데 결국 전제는 경제적 안정이다.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무병장수를 원하지만, 유병장수 시대가 되었다. 유병 상태에서 장수 하려면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간다. 부양해 줄 가족이 없다면 사회의 몫이 되어 우리는 그 부담을 더 안게 된다. 안정적 경제 능력을 갖춘 건강한 노년은 누구에게 가능할 수 있을까.

아버지의 치료비와 간병비는 우리 가족의 당면 과제다. 그나마 있는 아버지의 재산은 거기에 쓰여야 한다. 두 번의 큰 수술을 앞두고, 지팡이를 짚어야만 일어설 수 있는 아버지는 일이 무척 하고 싶으신가 보다. 기관절제 덕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도 가을 추수해야 하니 올해 농사를 직접 지으라는 말을 몇 번이고 하신다.

김현진 청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김현진 청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살고자 하는 환자의 의지가 중요한 상황에서 희망이 있어 다행인가 싶다가도 가족들이 각자의 일에 전업농 수준의 농사까지 짓는 건 도무지 상상도 안된다. 의료비를 위해 우리는 또 어떤 한 해를 보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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