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김호성 / KBS청주 아나운서

내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헤아려 보겠어요/ 난 사랑합니다/ 내 영혼이 미칠수 있는 깊이와 넓이와 높이에 이르도록/ 사람들이 권리를 위해 투쟁하듯/ 사람들이 칭찬에서 돌아서듯/ 밤이나 낮이나/ 내 어린 시절의 신앙으로 그대를 사랑합니다.

브라우닝의 시를 처음 만난 것은 20여 년 전 즈음이었다. 어느 TV 인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었는데 에필로그 부문에서 이 브라우닝의 시 ‘How do I love thee’가 자막으로 흘러나왔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 단번에 그 시에 빠져들었다.

특히 ‘내 어릴 적 신앙으로 그대를 사랑합니다’ 하는 부문에서는 숨이 턱 멎는 듯 했다. 나는 곧 단골 서점으로 갔다. 헌 책을 파는 그 서점을 다 뒤져 찾아낸 두툼한 녹색 표지의 시집.

겉 표지에 ‘블아운닝’이라고 표기 돼 있을 만큼 책은 한 시대의 강을 건너 남루한 세월의 때를 묻히고 내 앞에 왔다. 나는 편하고 헐렁한 오래된 바지 같은 그런 헌책의 여유가 좋았다.

묵은 책들은 언제나 안온한 표정으로 나를 안심시킨다. 그 속에 세월과 함께 남겨져있는 야사 같은 몇 줄의 낙서나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그려져 있는 이름할 수 없는 크로키 같은 그림들마저 나는 사랑한다.

내가 지금도 새책보다는 헌책 사기를 더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헌책을 사오면 꼭 책갈피 속을 속속 살펴보는 습관이 있는데 그것은 헌책 속에 끼워져 있는 빛 바랜 은행잎이나 단풍잎 또는 네잎크로버나 오래된 사진 같은 걸 보너스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헌책에서 두 장의 보물 같은 사진을 만났다.

한 장은 1945년 10월16일 제일교회 합창대가 지금의 일신여고에 있는 양관에서(당시 양관은 KBS청주 방송국 건물로 쓰였다) 미군환영 방송 합창을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이고 또 하나는 바로 브라우닝 시집에서 발견한 사진인데 한 교사로 보이는 여인이 만개한 목련나무아래서 풍금위에 앉아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과 함께 노래를 하는 모습의 흑백사진이다.

앞 사진은 사진 겉면에 뚜렷이 흰 글씨가 있어 좋았는데 뒷사진은 연대를 헤아리기가 힘들다. 다만 사진 속의 의상이나 머리모양, 안경등으로 봐서 60년대 즈음이 아닌가하는 추측이 인다.

햇살이 다사로운 어느 봄날 오후 음악시간이었다. 음악 선생님은 덩치가 큰 아이들 몇을 시켜 풍금을 목련나무 아래로 내 오라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붕붕 풍금을 타며 화음을 모았는데 분명 그 날의 노래는 ‘사월의 노러였을 것이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둔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이 아름다운 우리 서정가곡은 가사 속 풍경이 생생하게 떠오를 만큼 회화적인 게 특징이다. 우리는 너나할것없이 이 노래를 읊조리며 벅찬 가슴으로 4월을 맞는다. 이 한국최고의 가곡이 탄생 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6.25전쟁이 끝나고 당시 새로운 희망과 재건의 시대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학생계’라는 잡지가 창간됐다. ‘학생계’에서는 무언가 새로운 노래로 학생들의 정서를 순화하고 새 정서 속의 희망을 품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인 ‘박목월’과 작곡가 ‘김순애’에게 이러한 뜻을 전하며 한편의 창작 가곡을 위촉 의뢰했다.

가사는 쉽고 서정적이고 가슴 훈훈하게 그리고 선율은 한국적 선법을 바탕으로 어린 학생들이 쉽게 따라 부를수 있도록 간단한 음절의 질서있는 전개로… 가곡 ‘사월의 노러는 그렇게 만들어 졌다.

그리고 이 노래는 이후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가곡이 된 것이다. 사월이 오면 사람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누구나 베르테르 같은 편지를 쓰고 피리를 불며 멀리 떠나와 어느 바닷가 항구에서 배를 타고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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