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수의 문화산책] 김종수 건국대학교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

문무대왕릉
문무대왕릉

삼국통일의 영주 문무왕(661~681) 김법민(金法敏)은 626년에 태어났다. 태종무열왕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무열왕 2년(655년)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661년 부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문무왕은 아버지 태종무열왕의 유업을 계승하여 삼한을 통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비록 당군의 힘을 빌리기는 하였으나 삼국 간에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전쟁을 종식하고 이후 당과 벌인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나이 56세 되던 해인 681년에 태자인 정명에게 유조(遺詔)를 남기고 사망하였다. 문무왕의 재위 기간은 대략 20년이고 35세 장년의 나이에 임금이 되었기에 통일전쟁과 삼국 통합에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문무왕은 재위 21년째 되던 해인 681년 7월 1일에 사망하였는데, 그가 돌아가자 신하들이 그에게 문무(文武)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한 다음 동해 어구 큰 바위(東海口大石上)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문무왕은 죽기 직전에 신문왕이 되는 태자 정명에게 유조(遺詔)를 남겼는데 이 유조(遺詔)에는 질풍노도와 같았던 난세를 헤쳐온 자신의 일생에 대한 회고와 함께 죽은 후 장례 절차와 태자의 왕위 계승, 통일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의 고달픈 삶을 위로하고 부담을 덜어 줄 조세제도 개혁과 시의에 맞게 법령을 개정할 것 등 문무왕 개인과 왕실, 국가의 대계까지 세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그의 마지막 육성 중 첫째 단락을 인용해 본다.

"과인은 나라의 운이 어지럽고 전쟁의 때를 당하여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영토를 안정시켰고, 배반하는 무리를 치고 협조하는 무리를 불러들여 가까운 곳을 모두 평안하게 하였다. 위로는 조상들이 남긴 염려를 안심시켰고 아래로는 부자(父子)의 오랜 원수를 갚았으며,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상을 두루 주었고, 벼슬을 터서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하였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으며, 백성을 어질고 장수(長壽)하도록 이끌었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덜어주니 집집이 넉넉하고 백성들이 풍요하며 인간의 삶이 편안해지고 나라 안에 근심이 없게 되었다. 곳간에는 (곡식이) 산언덕처럼 쌓여 있고 감옥은 풀이 무성하게 되니, 신과 인간 모두에게 부끄럽지 않고 관리와 백성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스스로 온갖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고, 정치와 교화에 근심하고 힘쓰느라 더욱 심한 병이 되었다. 목숨은 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니 홀연히 긴 밤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찌 한스러움이 있겠는가?

신라의 임금 중에 임종 시 유언을 남긴 사례가 몇몇 있으나 주로 후계 지명에 관한 짧은 내용일 뿐이다. 문무왕이 이처럼 긴 유언을 조칙의 형식으로 남기고 이를 중외에 공포토록 한 것은 비록 무력으로 삼국을 하나로 통합하였으나 당시 불안한 정국 사정을 헤아려 사후에 나라의 안정과 왕통 계승 등에 대한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의 첫째 단락 유언은 문무왕 자신의 일생을 회고한 것으로 삼한일통의 대업을 달성하여 나라를 안정시키고 조상의 염려를 불식시켜 태평한 시대를 열었다는 자부심을 표출하였다. 특히 "신과 인간 모두에게 부끄럽지 아니하고 관리와 백성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 (可謂無愧於幽顯, 無負於士人)는 대목에서 동서고금에 이처럼 자신의 일생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던 군주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감탄하게 된다. 후단에는 이렇게 일생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하다가 고치기 어려운 병을 얻었으니 이제 죽는다고 해도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요즘 글쓰기로 봐도 손색이 없는 마무리이다. 앞에서는 자신의 공업(功業)에 대해 칭찬하고 끝부분에서는 병을 얻어 죽게 되는 인생의 허무함을 표현하였다.

김종수 건국대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
김종수 건국대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

삼국유사에 보면, 문무왕이 서울에 성곽을 쌓고자 하여 명령을 내렸는데 의상대사가 이 소식을 듣고 글을 보내 아뢰기를,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에 땅 금을 그어서 성으로 삼아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하고 정교가 밝지 못하면 비록 장성이 있더라도 재해를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공역을 중지하였다고 한다. 문무왕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라와 백성을 한결같이 사랑했던 영주였음을 그의 유조(遺詔)와 함께 실물로 남아있는 사천왕사지와 문무왕비, 대왕암은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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