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송문용 충남천안취재본부장
1919년 3월 1일 대한민국 곳곳에서 독립운동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3·1절이 올해로 105주년을 맞이했다.
10년 전, 김 모교수가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를 찾아가 사죄를 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든 영웅"이며 "친일 전력이 있는 이화학당 스승이 해방 후 유관순을 발굴해 영웅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해 논란을 빚었다.
이같은 주장은 2009년 3·1운동 90주년을 맞은 해 시작됐다. 정 모 교수가 "친일 혐의가 있는 우익 인사들과 기독교계가 합세해 유관순의 삶에 허구적 이미지를 덧씌워, 그의 희생 가치를 훼손했다"고 기념사업을 평가하자 김 교수가 이를 따른 것이다.
2년 전 여름, 한 지상파TV가 천안 병천의 아우내만세운동 기념비를 문제 삼아 보도했다. 그 비 모양이 일제 전몰장병비석을 본 따 유관순 등 순국자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3·1운동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유 열사에 대한 중대한 '공격'이 아닐 수 없다. 위 두 주장에 대해 정면 반박하고 나선 이가 조한필 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이다. 그는 1947년 유관순의 순국사실이 처음 알려지면서 행해졌던 추모·선양사업의 보고서('유관순實記')를 토대로 일부 학자와 언론의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았다.
기념사업으로 순국자 및 유가족 조사, 기념비 제막, 영화 촬영 지원, 전기 출간이 동시에 이뤄졌다. 이 사업들은 모두 병천 주민들에 의해 이뤄졌다. 조 전 원장에 따르면 친일 혐의자는 물론 독립지사들도 초기 관여만 했거나 잠시적 관심에 그쳤다.
만세운동 현장에서 돌아가신 19명을 밝혀내고, 그의 유족을 찾아 낸 것도 병천 주민들이었다. 십시일반 돈을 모아 1만여 명이 모인 기념비 제막식 행사를 치른 것도 주민들이었다. 1947년 10월 21일 유관순 영화는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재현장면을 찍었다. 그 시골에 주민 3천여명이 모여 촬영진을 놀라게 했다.
당시 광경을 본 주민은 "우리는 다시 삼십년 전 기미독립운동 당시의 기분으로 돌아갔다. 촬영대를 따르는 수백의 군중, 커트마다 감격이요, 장면마다 눈물이었다"고 말했다.
독립지사 한훈의 기념비 제막식 추도사에서 당시 추모사업에 임하는 이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는 먼저 "해방된 지 3년이 되는 금일, 국토는 양분된 그대로 사상은 혼란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진 이 착잡한 현상이 어찌 선열들의 피 흘려 순국하신 독립정신이며 끼치신 뜻이리요"라며 통탄했다. 이어 "삼천만 동포는 이날 이 자리에서 다시한번 굳게 반성하고 새로이 결심하여 국가 천년대업 성취에 대의 밝히기를 거듭 맹서하는 바입니다"라며 남북분단·좌우갈등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김구·이시영 등 다른 독립지사들도 추도사에서 거의 같은 내용을 말했다. 또 기념비 건립 발의문을 봐도 기념사업 취지가 명확하다. "3·1정신을 환기시키려면 당시 가장 포악한 희생을 당한 이 고장(병천) 사적을 널리 전 민족에 알리여 우리 민족끼리 단결하여야 국가의 독립이 있고, 민족의 자유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함이다."
유관순실기는 기념비 석재의 '정체'도 밝히고 있다. "왜적이 우리 민족을 황민화시키려고 애쓰던 소위 이 황국신민서사탑이라는 것을 연마해 쓰기로 했다"는 것이다. 일제는 이 탑을 통해 우리가 그들과 같은 국민이라고 억지 맹세를 강요했다. 주민들은 그 탑 비면을 갈아내고 거기에 만세운동 행적과 순국자 이름을 새기고 이렇게 평가했다. "이 탑이 선열의 충혼비가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통쾌한 일이며 천상에 계신 열사의 영령도 얼마나 기뻐하시랴!"라며 전승탑으로 여겼다.
이렇듯 77년 전 기념비를 세우고 순국자를 추도한 뜻은 명백했다. 민족이 통합된 완전한 독립 쟁취였다. 이는 지금도 이뤄지지 못한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