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 시인

“열을 가르치려는 욕심보다 / 하나를 바라게 가르치는 소박함을 / 알게 하소서 / ......아이들의 앞에 서는 자 되기보다 / 아이들의 뒤에 서는 자 되기를 / 바라나이다 / 당신에게 바치는 기도보다도 / 아이들에게 바치는 사랑이 더 크게 해주시고 / 소리로 요란하지 않고 / 마음으로 말하는 법을 깨우쳐 주소서 / 당신이 비를 내리는 일처럼 / 꽃밭에 물을 주는 마음을 일러주시고 / 아이들의 이름을 꽃처럼 가꾸는 기쁨을 / 남 몰래 키워가는 비밀 하나를 / 끝내 지키도록 해 주소서 / 흙먼지로 돌아가는 날까지 / 그들을 결코 배반하지 않게 해주시고 / 그리고 마침내 다시 돌아와 / 그들 곁에 순한 바람으로 / 머물게 하소서”

스승의 날이면 김시천 시인의 시「아이들을 위한 기도」를 조용히 읽어본다. 나는 열을 가르치려는 욕심이 앞서는 교사는 아니었는지, 하나를 바르게 가르치는 교사였는지 생각해 본다. 아이들 앞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 것인가 만을 고민하는 교사였는지, 아이들 뒤에서 아이들과 걸음을 맞추며 함께 가는 교사였는지 되돌아본다. 나는 아이들을 배반하는 교사는 아니었는지 아이들에게 신뢰받는 선생이었는지 반성하며 자신을 살펴본다.

우리가 아이들을 교육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헤쳐 나갈 수 있게 만드는 것과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갖춘 젊은이를 길러내는 데 목적이 있다. 그렇게 해서 저마다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며 살기 좋은 사회를 이루고자 교육을 하는 것이다. 교사나 부모 모두 아이들이 학교교육을 받고 난 뒤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되기를 꿈꾼다. 그런데 부모나 교사가 바라는 행복은 대개 존재론적 행복이다. 내 자식, 내 제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충족될 수 있겠는가를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판단한다. 내 자식과 남의 자식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되기를 함께 꿈꾸어야 한다. 존재론적 행복도 중요하지만 관계론적 행복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바라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도 평등한 사회, 평화로운 나라, 깨끗한 환경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어떻게 교육하고 있는가? 상호경쟁하는 시스템을 주로 활용하고 있다. 상호경쟁을 통해 상층부로 진입하는 아이들에게만 크고 많은 기회와 행복이 주어지는 구조를 만들어 놓고 그 틀 안에서 교육하고 있다. 그래서 상호부조하며 공존 공생하는 사회의 상은 이상적인 교육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힘의 논리 강자의 논리를 내면화하게 하고, 상생의 논리, 소통과 공존의 논리를 약자의 자기 합리화에 그치는 것인 양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문화교육보다는 지식교육을 택하고 있고, 서로 잘 살기 위한 공부보다는 자기만 잘 되기 위한 공부를 하게 하고 있다. 학생만이 아니라 교사도 경쟁시스템 속에 집어넣고 휘몰아치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

너무 많은 양의 지식을 가르치기 위해 너무나 많은 시간을 소모하면서 교사와 학생은 지쳐 있다. 교사들이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왜 교단에 서 있는가?’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해 보는 스승의 날이었으면 좋겠다. 교사를 위해서 학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서 교사인 내가 있는 것이다. 아이들을 배반하지 않는 교사로 교실에 서 있는지, 아이들이 성장한 뒤에도 나를 가슴에 남는 스승으로 생각하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는 스승의 날이었으면 좋겠다. 푸른 나무처럼 쑥숙 자라는 아이들 곁에 한 줄기 순한 바람으로 서 있기를 바라며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교사로 있는지 생각해 보는 스승의 날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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