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기 / 충북도교육청 교육협력관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일컫는 교직의 보람 뒤에는,교직선택에 대한 적지 않은 후회와 실망도 있다.그것은,교권이 침해당하고 교사의 권위가 무너질 때 가장 클 것이다.

교사의 권위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나오는 해답들이라는 게,삼비론(三非論)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그동안 우리는 보아 왔다.

- 교사는,소명의식이 없고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부족하다.
- 학부모는,학교에 참여를 넘어 지나치게 간섭하고 자녀를 과보호 한다.
- 사회는,툭하면 교사를 매도한다.

결국 누구에게나 책임이 있고,결국은 아무에게도 책임이 없는 것 같은 이상한 결론에 이른다.이제는 한 발 더 나아간 결론이 필요할 것 같다.

아이들 가르치는 문제에 대한 책임이,가르치는 주체인 교직사회 ‘내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부에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교직 선택에는 고결한 스승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존중되었다.현재는,정년보장과 안정성, ‘적지 않은’ 급여 수준 등 실리적 가치가 더 존중되는 듯한 느낌이다.

이런 실리적 가치만이 선택의 기준이라면, 교직이 지식 전달자 이상의 대우를 바라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이다.

우리 교직사회 내부에 더 많은 문제가 있다면,이를 해소할 방법을 찾는 게 정석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교직사회의 변화뿐이다.지금 세상은 모든 사회가 열려 있다.교직도 예외일 수는 없다.

교원평가에 대한 논의가 많다.이에 반대하는 논리가,혹시 교직의 전문성과 자주성의 곡해(曲解)에서 비롯된 배타적 사고(思考)로부터 나온 것은 아닌지 학부모들은 궁금해 한다.무엇이 문제이고 교권이 훼손당할 소지가 어디에 있는지,차근차근 논의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타협 없는 반대 논리만 펼 경우,자칫 학부모로부터 외면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의 종아리가 붉게 물든 흔적을 본 K씨가,학교에 전화를 걸었다.선생님의 전화 응대 목소리에 K씨는 깜짝 놀랐다.“어디로 찾아뵐까요,사무실로 갈까요,댁으로 찾아뵐까요?”

자식을 ‘제대로’ 길러주는데 대한 고마운 마음에 소주 한잔 나누려고 했던 K씨의 전화를,선생님은 ‘항의’ 전화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 순간 선생님의 자존심은 완전히 무너졌고,교직 선택에 대한 후회와 회의(懷疑)로 머릿속이 꽉 찼을 것이다.

하지만 이 땅의 아이들을 걱정하면서 밤늦도록 행해진 두 사람의 통음(痛飮)으로, 선생님의 자존심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이처럼 선생님을 보는 대부분 학부모의 눈은,학교에서 일어나는 시시콜콜한 일들에 관심을 두는 ‘시시한 언론들’과는 다르다.

“엄마! 나,선생 관둘까?”

신참 여선생님과 조숙한 초등 여학생 사이의 사제(師弟) 갈등을 코믹하게 다룬 영화에서,교직생활에 갈등을 겪는 여교사가 어머니에게 하는 말이다.심각한 딸의 질문에,어머니의 대답은 시큰둥하다.

“선생이 뭐 별거니? 먼저 나서,뒷사람들 본보기 되게 잘 살면 그게 다 선생인 거지”

남에게 본보기 되게 사는지 그렇지 않은지는,하늘도 땅도 아이들도 학부모도,그리고 선생님 자신도,알 사람은 다 알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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