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김상수 / 청주노인종합복지회관장

계절이 바뀌면 매장마다 새롭게 단장하느라 부산하다.아예 건물 자체까지 리모델링하기도 한다. 보통 리모델링을 ‘낡고 오래된 아파트나 주택,대형건물 등을 현대감각에 맞게 최신 유행의 구조로 바꾸어 주는 개보수작업’이라고 한다.리모델링 붐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골격은 그대로 둔 채 내부나 외부,혹은 전체를 새로운 자재로 교체함으로써 훨씬 편리하게 주거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골격이 튼튼하지 못한 집은 아예 리모델링을 할 수가 없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사람은 변화하는 세상을 어떻게 적응하며 살까? 물론 사람은 시시때때로 새로 유행하는 옷을 걸치고 헤어스타일을 바꾸기만 하면 금방 새로운 분위기를 낼 수가 있다. 즉석에서 리모델링을 할 수가 있다. 이것으로 사람의 리모델링은 끝난 것일까?

사람은 사고(思考)하는 동물이라고 했다. 사람의 본질은 외부적인 변화만으로 쉽게 바꿀 수가 없다. 진정한 리모델링은 사고의 변환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오랜 농경문화가 바탕이 되어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20세기에 우리는 왕정체제와 일제 식민지와 민주주의라는 서로 다른 정치 체제의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국민 개개의 각성과 열망이 바탕이 된 주도적 사건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우리의 사는 조건이 바뀐 부분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 개개의 가치관은 과거의 체제와 현재의 체제가 뒤섞여 혼란스럽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투명한 공개와 평가와 사회적 합의가 없었기에 하나의 사건에 대한 가치판단도 세대마다, 상황마다 다르다.

사람의 골격에 해당하는 부분을 나는 사고(思考)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사고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 쉽게 내면의 각성과 통찰 없이 사회의 조류에 휩쓸려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 언론과 방송이 우리의 판단을 앞질러 해주면 우리는 끄덕끄덕 순응하기만 하면 된다.

2천년 전 예수님은 지배구조가 엄격한 유대사회에서 나셨다. 가치판단의 몫은 당연히 지배 권력이었다. 일반 민중의 우둔함은 부당함에 저항할 줄 모르고, 권력에 예속된 채로 순응하며 사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부당함에 저항하고 인간의 자유와 권위를 위해 예수님은 민중을 일깨우셨다. 때문에 예수님은 완고한 유대전통사회에서 이단아였고, 기득권을 뿌리 채 흔드는 위험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사는 사회는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 누려야할 진정한 자유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다. 거대한 사회의 흐름과 거대 자본과 거대한 판단력에 예속된 채로 살고 있다. ‘나’의 존엄을 위한 ‘내’가 찾아야할 ‘나’의 방향성이 없다.

세상을 변화시킨 건 사람이다. 그러나 일상에 매몰된 채 사느라 바쁜 우리는 변화가 없다. 이게 무슨 모순일까? 내가 삶의 주인이 아니기에 변화하는 삶의 주인도 내가 될 수 없다. 세상은 변해서 많은 걸 개보수해야 하는데, 우리의 사고는 과거에 천착된 채 요지부동이다.

우리들의 사고(思考)에 리모델링을 권한다. ‘새 술은 새 푸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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