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범죄의 재구성’(2004)의 서인경

<캐릭터로 영화 읽기-한국 영화 속 그녀(들)>

‘범죄의 재구성’(최동훈 감독?2004)의 서인경(염정아)을 두고 사람들은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라 부른다-혹은 부르고 싶어 한다. 하긴 그녀를 그리 부르는 것이 얼토당토않은 것만은 아니다. 인경은 종전까지 여성의 끼어듬을 거부했던 남성들만의 세계를 넘본다. 폭력과 폭언, 음모와 비리, 배신과 협상으로 얼룩진 피비린내 나는 정글의 세계에 겁도 없이 발을 내디디며 호언장담한다. “일단은 들어왔어! 게임 끝났어! 다 죽었어!”라고.

# 그러니까 3류라고 했잖아!

인경의 첫 등장은 특히 그럴듯하다. 깊숙한 곳까지 허벅지를 드러내는 검은 가죽치마, 현란한 무늬의 검은 색 망사 스타킹, 검보라색 선글라스, 강렬한 웨이브 머리, 보라색 숄, 긴 목장갑-의 색과 재질이 썩 잘 어울렸던 건 아니지만-과 길게 내뿜는 담배 연기 등, 경찰서에서 목격하는 그녀는 팜므 파탈을 증거하는 일련의 도상성을 요령껏 갖추었다고 하겠다.

‘삼촌’이라 부르는 초로의 남자 김선생(백윤식)과 동거하면서도 ‘웃는 거 걷는 거 담배 피는 거’ 모두 멋있는 최창혁(박신양)의 유혹에 흔쾌히 넘어가는 것도 자격요건에 부합한다. 돈 5억에 전 남자의 형을 잽싸게 유혹하는 ‘정조 없음’은 특히 점수를 높게 쳐줄만하지 않던가. 그저 자기 안의 욕망에 따라 유혹하고 혹은 ‘비즈니스’함으로써 엄숙한 가부장제적 질서를 맹랑하게 능멸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팜므 파탈인가에 대한 답은, 전복적이고 도발적인 여성캐릭터의 출현 혹은 재림을 갈망하는 이들에게는 아쉽게도, 부정적이다. 서인경은 한국은행 50억 강탈 사건을 재구성하는 영화 전반부에 그저 배경으로만 머문다. 그녀가 돈 놓고 돈 먹는 남자들의 이전투구 판에 끼겠다고 ‘감히’ 출사표를 던지는 건, 최창혁의 복수 시나리오가 작동되는 후반부에서부터다.

그녀의 팜므 파탈되기는 보험금 5억 원의 존재를 인지한 직후 시작된다. “오후면 좀 나른해지거든요. 고양이 같이…” 살짝 머리카락을 꼬아주는 요염한 포즈를 취하더니, 헌책방 주인의 취향일 법한 생머리로 변신을 시도한다. 팬티 차림으로 춤을 추거나 로또 복권을 안기는 다양한 공략 방법을 구상할 때 혹은 최창호의 정체가 드러난 후 김선생과 ‘20%, 30%의 비즈니스’를 논할 때, 그리고 정체불명의 여자 전화가 중요 단서로 부상할 때쯤이면 그녀는 자못 팜므 파탈답다.

하지만 인경은 최창혁의 손바닥 안에 놓인 신세, 거대하고도 정교한 복수극을 위한 유용한 미끼 혹은 소도구로 활용된다. 내러티브를 관통하는 음모의 중심적 주체여야 할 팜므 파탈로서의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도 “50억? 보험금 5억 말고 더 있단 말이야?” 한심하게 뒷북이나 치고 있으니 김선생의 면박을 감수할 밖에. “그러니까 내가 널 보고 3류란 거 아냐~. 그 새끼가 널 가지고 놀고 있잖아.”

# 언젠간 치겠지, 그의 뒤통수?

“조마조마하고 불안하고 짜릿하면서도 그냥 따라가고 싶은” 남자, 창혁을 선택하는 인경의 캐스팅 보트로 게임은 종료된다. 늙고 추레한 남자의 품에서 젊고 돈 많은 남자의 품으로 좌표 이동한 인경은 이로써 ‘우울한 라이프 스타일’을 청산한 것처럼 보인다. 눈처럼 하얀 모피코트에 감싸인 그녀의 얼굴은 젊고 능력 있는 남자와 비즈니스와 사생활을 함께 하는 만족감으로 반짝이는 듯하다

그런데, 그녀는 정말 이제 됐다고 생각하는 걸까. “지금까지 나쁜 남자들 많이 만나봤는데 나한테 끝까지 좋은 남자여야 해요” 당부하더니 창호이자 창혁을 ‘좋은 남자’로, 5억을 그가 자신을 진짜 좋아하는 증거로 덜컥 믿어버린 걸까. 살 섞은 남자들을 눈도 깜빡 않고 해치우는 악마 같은 여자들을 팜므 파탈이라 불러왔던 이들에게 인경의 이런 믿음은 너무 낭만적이어서 비현실적이다. ‘5억의 30%’(김선생) vs ‘5억’(최창혁)의 자명함 또한 이에 대한 단정을 유보시킨다.

엎치락뒤치락 숨 가쁜 역주 끝에 영화는 일견 ‘부부 사기단’ 혹은 ‘커플 사기단’의 출범기로 종료되는 듯하다. 하지만 둘의 낭만적 파트너십에서는 균열의 조짐이 너무 농후해서 그들의 후일담이 자꾸만 궁금해진다. 창혁과 함께 ‘어찌됐든’ 돈 가방의 임자가 된 인경이 언제까지 최후의 승자인 남자의 여자로만, 그의 협력자로만 만족할 것인가. 그가 ‘사부’인 최창혁을 넘어서는 ‘청출어람’의 경지를 보여주리라는 데 과감하게 배팅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사기는 테크닉이 아니라 심리전”이라는 핵심마저 간파해버렸으니 이제 인경의 ‘하산’ 시점은 코앞이지 않을까. 어찌됐건 둘의 연대는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박인영·충북대강사

[Character & Actress] 염정아
‘범죄의 재구성’에서 염정아(34)는 단연 두드러진다. 출중한 연기 경력과 내공의 남자배우들 사이에서 혹시 ‘꽃병의 꽃’으로 전락하지 않을까하는 우려를 깨끗이 날려버린다. 장르적 상상력의 한국적 변용을 선보인 영화에서 그는 철저히 장르적인 인경 캐릭터의 뼈대에 착실하게 살을 붙여나간다. 그것을 팜므 파탈이라 부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서인경은 배우 염정아를 만남으로써 생생한 활기를 부여받는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위협적으로 전시한다는 점에서 팜므 파탈이 주목받았다면 염정아 또한 그 점에서 단연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는 전력이 뒷받침하는 그의 육체적 매력은 여배우의 섹슈얼리티 재현에 관한 한 그다지 상상력의 범위가 넓지 않은 한국영화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만한 것이다.

혼자 똑똑한 척하지만 알고 보면 빈 구석이 많고 얕은 수가 뻔히 보이는, 그래서 배척하기보다는 친하고 싶은 캐릭터로 인경역이 완성된 데도 자연인 염정아와 캐릭터 해석의 영향이 크다. 인경이 내러티브상으로 응징되거나 처벌당하지 않고 최후 승자의 옆에서 웃는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도 그녀와 그녀의 섹슈얼리티가 처음부터 남성관객과 기존 질서를 위협할 만큼 위험하고 치명적인 것이 아니었던 때문이기도 하다.

1991년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으로 데뷔한 이래 바닥에 떨어져본 적도, 정상에 올라본 적도 없이 늘 그렇게 우리들 옆에 있어왔던 배우 염정아는 너무나 예민해서 공포스럽던 ‘장화, 홍련’(은주)에서 ‘범죄의 재구성’을 거쳐 그만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그 영역을 계속 답사하다보면 치명적으로 노련한 한 마리 암고양이를 만날 날이 올 것 같다. 날카로운 발톱을 앞세워 그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는, 그래서 머리털이 쭈뼛 솟을 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의 암고양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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