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꽃은 참 소박하게 핀다. 꽃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화려하거나 특별한 구석이 없다.자신을 내세우거나 드러나 보이게 하기보다 수줍은 표정으로 한발 뒤로 물러서 있는 모습이다.그러나 감자꽃은 보이지 않는 땅 속에 다른 꽃들이 따라오기 어려울 정도의 굵고 실한 감자알들을 키우고 있다. 안으로는 튼실한 결실을 지니면서도 겉으로는 소박한 모습으로 서 있는 이것이 바로 감자꽃의 미덕이다.

엊그제 충주에서는 감자꽃의 동요시인 권태응선생의 문학잔치가 있었다. 10년째를 맞는 이 문학행사는 다른 문학제와 다르게 어린이들과 함께 참 조촐하게 치러졌다. 행사규모도 소박하고 관계기관에서 지원하는 예산도 충북도내 다른 자치단체의 10분의 1정도, 타시도의 문학제와 비교하면 50분의 1정도의 예산을 지원받아서 치르고 있었다.

그러나 세미나에서는 일제경찰기록을 통해서 재조명한 권태응선생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생애와,유족들에게 전해 받은 세 편의 단편소설과,돌아가시기 전 피난길에서 쓴 40편의 동시를 묶은 동시집에 대한 발제와 토론이 있었다. 세 분야의 논문은 권태응선생의 문학세계와 생애를 더 깊게 이해하게 해주고 풍요롭게 해 주는 것들이었다.

그동안 구전으로만 전해 오던 독립운동의 행적들을 경찰기록은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었다.권태응 선생은 경성제일고보 재학시절 일본인 교사들이 “너희들은 조센징이 아니냐?”라고 차별하는 것을 보며 민족의식을 갖게 되고, 그 분노를 개인적인 불평으로 풀어버리지 않고 친구들과 구락부를 결성하여 집단적으로 해결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정기적인 등산모임을 갖고 일주일 간격으로 돌려가며 모둠일기를 쓰면서 의식과 행동의 통일을 가져보려고 하였다. 일제식민지 교육에 대해 저항하였고 친일에 앞장서는 학생들이 “천황폐하의 홍은과 학교의 은택으로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고 하는 말을 들으며 그들을 집단폭행하고 구속되기도 하였다.

일본에 유학을 가서도 33회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그들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이론적으로 무장하였는지 경찰기록은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전쟁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고, 일본이 패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 있었으며, 독립의 실현이 가까운 장래의 일이라면 평소에 그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권태응선생의 문학이 일본유학과정에서 고민하였던 이런 민족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창조되었음을 경찰기록은 알게 해준다. 이번에 공개된 세 편의 소설은 해방을 전후해 쓴 단편소설인데 「새살림」은 소작인 부부의 핍박과 아픔과 갈등을 잘 그린 작품이고 「별리」는 일본 유학을 하는 두 대학생을 대비하면서 당대 조선인 유학생들의 상반된 삶의 양태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앙반머슴」은 윤서방이란 인물을 통해 해방 전 일제의 수탈과 착취로 인해 고통 받는 동네사람들을 다독이고 위로하며 해방이 온 뒤에는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고 처신해야 하는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동네사람들에게 희망과 활기를 불어 넣는 내용을 담고 있는 전형적인 농민소설이다.

아직도 60년이 넘도록 가족들이 소장하고 있는 단편소설 원고, 300편이 넘는 동시의 육필 원고와 각종 사진과 자료들을 보존해야 할 문학관이 만들어지고 생가가 지어져야 할 할 터인데 칠금동 생가 터에 법무부 보호관찰소를 지을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온 국민이 다 아는 감자꽃의 동요시인이요, 독립운동을 하다 스가모형무소에 갇히고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돌아가신 우리 지역의 독립운동가에 대해 후손인 우리들이 너무 잘못하고 있는 것 같다. 권태응선생의 생애와 문학과 정신을 어린이와 학생들에게 알리고 가르치는 일에 소홀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문학관과 생가를 지어야 할 시인의 생가 터를 밀어버리고 보호관찰소를 짓는다니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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