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로 영화 읽기 한국 영화 속 그녀(들)

<23> 쉬리 (1998)

이방희(박은숙)이자 이명현(김윤진), 혹은 이방희이거나 이명현인 여자, 아니면 이방희도 이명현도 아닌 여자. 한 몸에 두 개의 영혼과 이름을 가진 '쉬리'(강제규 감독)의 여주인공을 보는 우리들의 시선은 하염없이 서성거린다. 무서운 여자, 혹은 불쌍한 여자. 아니 불쌍해보여야만 우리들의 무서움을 은폐할 수 있었던 여자. 그의 몸은 '한 민족 두 국가'의 비극을 은유하는 것이자, 분단국가에서 살아가는 한반도 이남 대중들의 무의식을 증거하는 장소가 된다. 한 편으로는 제거돼야만 하는 가공할 적대감과 공포의 대상인 '적'(이방희)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 우리의 따뜻한 손길을 그리워하는 절대적인 약자로서의 '동족'(이명현)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비극으로 귀결된 이방희/이명현의 분열이 그저 '히드라'로서의 슬픈 운명 때문이기만 할까. 어쩌면 남성중심적 민족 서! 사에 개입하려했던 여성에게 주어진 가혹한 형벌은 아니었을까.

# 이방희 혹은 이명현

북한 8군단의 최정예 요원으로 신념에 찬 여성/전사 이방희는 한반도의 운명을 둘러싼 공식적인 담론과 행위의 충돌 현장에 깊숙하게 개입한다. 그 어떤 남성보다도 더욱 남성주체적 역할수행에 충실하고 탁월한 그가, 21세기를 목전에 둔 남한 사회 한복판을 가차없이 훼손하고 유린할 때 그녀의 타자성은 두드러진다. 명백한 적의 관계에 놓인 유중원(한석규)과 박무영(최민식)이 잠재적 소통상태를 지나 심지어 형제애를 공유하는 것처럼 묘사되는 것과 비교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 점에서 이방희의 위험성은 남한사회의 평화와 안녕을 해치는 북한체제의 수호자로서뿐만 아니라-아니 어쩌면 그보다는 더욱-남성적 질서에 도전한 여성으로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오욕과 굴욕의 분단 50년'을 폐기하고자 하는 의무감과 책임의식으로 무장하고 가족사진을 불살라버림으로써 개인으로서의 존재를 지워버린 이방희의 길을, 이명현은 거슬러오른다. 총과 폭탄, 신분 위장과 도청 등으로 구축되는 남자들의 세계에서 자기 존재에 대한 회의와 환멸을 곱씹으며 여성의 세계, 사적 영역으로 회귀하려는 간절한 열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알콜중독이라는 질환을 빌려서까지 증거하고자 노력하는 그 열망은 관상용 어류를 키우며 남자의 밥과 빨래를 하고 뜨개질을 하는 전통적인 현모양처 역할 학습으로 이어진다.

이로써 액션 장르의 강력한 히로인으로서의 이방희와, 멜로드라마의 애절한 히로인으로서의 이명현은 영원히 화합할 수 없는 갈림길을 지난다. 공적영역 속에서 죽음을 맞은 이방희가 가혹하게 내쳐지고 외면당하는 대신 이명현이 애틋한 애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음성 메시지와 직접 짠 스웨터라는 알리바이를 통해, 심지어 이장길(송강호)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위치를 확보하는 그녀는 가족을 그리워하는 구성원이었으며, 아이를 임신한 '미래의 어머니'였고, 유중원과 새로운 가족을 만들기 직전이었다는 정황으로 인해 가족제도에 대한 헌신적 태도를 인정받는다. 그 결과 단 한 가지 욕망했던 "무슨 일이 생겨도 이해해주고 미워하지 않기"의 선물을 받아들게 되는 것이다.

# 살인기계 혹은 한 여자

남자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님을 확인시키면서 남자들을 안심시키고 가정으로의 귀환을 설득해내는 이명현은 남한 체제와 그 휴머니즘('사랑')이 북한의 그것('이념')보다 우월하다는 냉전논리를 재확인하고 강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는 동시에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를 바탕으로 한 남한사회의 가부장제적 자본주의의 우월성이 냉전논리의 근본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여성성이 철저하게 배제됐던 살인기계 이방희와, 남한 남자의 아내 혹은 어머니가 될 수 있던 이명현이 한 몸일 수 있었던 역설은 결국 남한 체제의 상대적 우월성에 대한 자신감이 바탕에 있었기에 가능했었던 것이다.

이방희/이명현은 뒤늦게 도착한 사랑 고백에서 "중원씨와 지낸 지난 1년이 내 삶의 전부"라면서 "그 순간은 이명현도 이방희도 아닌 그냥 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정당하고 지워진 건 이방희일 뿐-"이방희가 아닌 이명현입니다"-이명현은 남는다. 하나는 유중원과 관객들의 가슴 속에 애도의 대상으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파리한 낯빛의 환자 이명현(김윤진)으로.

제주도의 이명현은 아이 같은 나약함과 순수함을 간직한 소녀로 일체의 활동성이 배제된다. 이방희로 태어나고, 이명현으로 분열되기 이전의 상태에 머물러있는 듯한 그녀의 이미지는 고스란히 북한체제와 여성이라는 타자를 향한 남한사회와 남성대중의 판타지로 갈음된다. 어떤 세상의 질서도 틈입하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백지상태, 아무런 위험성도 지니지 않은 순도 100%의 안전지대. 영화 '쉬리'가 리얼 판타지 드라마로 다가오는 건 바로 이 대목이다. / 박인영·충북대강사

"이질감과 모호함의 카리스마"
Character & Actress 김윤진

열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예술고등학교와 보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드라마 아카데미에서 연기를 전공했다는 배우 김윤진(33)은 낯설었다. 이미 96년 '화려한 귀가'를 시작으로 몇몇 드라마에서 낯을 익혔다고 해도 이방희와 이명현, 또 다른 이명현으로 다중 분열하는 미스테리 캐릭터를 관객들에게 설득시킬 만큼 충분히 이질적이었다.

서구적이며 현대적인 감성의 마스크 또한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여전사'로서의 이미지 구축에 효과적이었다. 동시에 쟁쟁한 톱스타들과의 공연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당당함과 자신만만함은 풍요롭고 아름다운 남한 여성에 대한 판타지를 만족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외국계 레스토랑, 야외 카페, 뮤지컬 공연장 등 이미 전지구적인 세계화 대열에 적극 가세하고 있는 남한사회의 물질적 풍요를 과시하는 일련의 공간들과, 미국서 성장한 재미교포 배우라는 그의 독특한 위치는 더없이 잘 들어맞는 짝이었던 셈이다.



그는 현재 할리우드에서 한국 이름 석자를 내걸고 한국어 연기를 선보이는 할리우드 주류배우로 착실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한국영화 패러다임을 새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영화의 여주인공다운 당당한 행보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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