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만 놓고 보면 봉준호 감독은 정말 행복한 감독이다. 지금까지 세 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는데, 두 편이 비평과 흥행을 모두 잡는 데 성공했고 그 중 한 편은 국내 영화사상 최고 흥행작이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제작과정을 들여다보면 세 편 모두 상상 이상의 고민과 어려움,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게다가 그 힘겨움은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보다 두번째 작품 '살인의 추억' 때가 더 심했고, 그보다 '괴물'이 몇 배 더했다.

최근 연세대에서 열린 봉 감독과 '괴물' 관객과의 대화에서 그가 들려준 세 작품의 제작 비화가 재미있다.

우선 '플란다스의 개'. 국내 최대 제작사 싸이더스FNH의 전신인 우노필름 시절, 이 회사에서 3~4년 간 연출부 생활을 하던 봉 감독은 드디어 대망의 감독 데뷔 기회를 잡았다. 차승재 대표가 기회를 준 것.

그런데 그가 차 대표에게 들고 간 이야기는 차 대표를 황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대학 강사 자리를 노리는 한 남자가 옆집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아 개를 납치해 어떻게 해보려 한다는 이야기. 거기에 여상을 졸업하고 아파트 동사무소에서 일하는 한 엉뚱한 여성이 여주인이다.

봉 감독은 "정우성 씨가 나오는 '모텔 선인장'이라는 영화의 조감독을 했던 우노필름에서 자연스럽게 감독 데뷔를 준비하게 됐는데, 차 대표에게 데뷔작 아이디어를 설명하니 너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라"며 웃었다.

"차 대표는 간단한 제 이야기를 들고는 약 5분 정도 마주앉은 상대를 무시하는 듯 아무 말도 안 하고 다른 일을 했어요. 전화도 받고 서류도 뒤적이고…(웃음). 반응이 차갑긴 했지만 계속 얘기를 해나갔는데 왠지 얘기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내 자신이 초라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차 대표는 결국 '아, 알았어, 알았어'라며 내 말을 끊었고 '진행비 줄 테니 시나리오나 일단 써봐'라고 하더군요(웃음)."
그는 "친한 선배에게도 영화 스토리를 들려줬더니 '회사에서 그걸 영화로 만든대?'라고 반문했고, 또 어떤 선배는 술을 사주며 '왜 그런 이야기로 데뷔하려 하느냐'고도 했다"며 웃었다.

"그런데 제가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서인지 그런 얘기를 들을수록 오기가 생겨 더 독하게 하려고 했어요. 대체적으로 너무 자질구레한 이야기라는 평이었는데, 반발심에 오히려 더 자질구레한 에피소드를 추가해나갔습니다. 사소한 일상적인 얘기로도 강렬한 장편영화를 찍을 수 있음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했죠. 당시만 해도 제가 만든 세 편의 단편영화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일종의 압박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봉을 하니 말 그대로 대 실패를 했죠(웃음)."
'플란다스의 개'가 실패한 후 '살인의 추억'을 준비했으니 이 영화의 준비 과정이 행복했을 리 없다.

"'살인의 추억' 때도 주변에서 말들이 많았습니다. 결정적으로 '범인이 안 잡히는데 도대체 그 스토리를 어떻게 할 것이냐', '관객의 환불 소동이 일어나지 않겠느냐'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어떤 여성 제작자는 '실제 화성연쇄살인사건은 미제 사건이지만 영화에서는 형사들이 통쾌하게 범인을 잡는 것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도 하더군요."
더욱 놀라운 일도 있었다.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받는 '살인의 추억'을 영화로 직접 보고 나서도 투자를 철회하는 투자자가 생긴 것.

"준비단계는 그렇다 치더라도 심지어는 영화의 최종 편집본을 보고도 투자했던 돈을 회수해갔던 투자자도 있었어요. 그것은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다행히 철회해간 돈이 적긴 했지만 당시에는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대단한 압박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나서도 '이 영화는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니까요. 개봉을 앞둔 상태에서 영화 프린트에 삽입한 그 투자자의 이름을 지우는 작업을 하면서 암울한 기운이 밀려왔습니다. 개봉 직전 미리 사형선고를 받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은 보란 듯이 성공했다. 누가 봐도 봉 감독이 그 다음 작품은 기분 좋게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소재가 괴물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도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봉 감독은 "일단 '괴물'은 스토리를 말할 필요도 없었다. 괴물 이야기를 한다니까 사람들이 얘기를 듣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심한 말도 들었어요. ''살인의 추억' 한 편 잘되니 무서운 줄도 모르고 이상한 영화를 하려고 한다', '어쩌자고 이무기 영화를 찍으려 하느냐', '어떻게 한강에서 괴물이 나오느냐. 너 요즘 힘들구나' 등 불화살들이 마구 날아왔어요. 친구들도 5초 정도 얘기를 들으면 바로 진지하게 '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봉 감독은 "분명한 것은 '살인의 추억'이 잘돼 이 영화를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고 못박았다.

"'살인의 추억'의 촬영도 들어가기 전에 청어람 최용배 대표와 '괴물' 이야기를 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억울했죠. 괴물 장르 자체에 대한 편견이 너무 많아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같은 외부의 비난과 우려, 지적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진단했다.

"사실 그런 식의 반응이 오히려 저를 자극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심정적으로뿐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런 편견과 우려를 어떻게 하면 깰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죠. 제가 피해가야 할 것들, 범하지 말아야 할 오류들을 미리 생각해보게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고맙죠."
봉 감독, 과연 다음 작품은 축복 속에서 만들 수 있을까.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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