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수 / 참도깨비어린이도서관

진천에 있는 보탑사에 갔다가 여우꼬리를 보았더랬습니다. 그런데 온갖 꽃이 앞 다투어 핀 절집 구경을 마치고 돌아나오는 길에 빨간 솜털을 꼿꼿하게 들어올리며 유혹을 하는게 아닙니까.

금세 참기름 바른 여우누이 손이 몸속으로 쑤욱 들어올 것 같은, 소슬한 날씨 또한 한몫을 해서 누군가의 시에 나오듯 그냥 홀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더군요. 시뻘건 간이 눈앞에서 여우누이의 입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도 ‘아직까지는 살아있어’ 하는 몽롱한 기분으로 절문을 닫을 때까지 앉아있어도 좋을 만큼 때론.

빨간 여우가 있었던가요? 누가 지었는지 참 이름 한 번 잘 지었다 싶은 게 가만 있을 수 있나요? 입안에서 한 번 궁글려보고 나서 여우꼬리를 쓰다듬어 보았지요. 마침 옆에서는 검은꼬리박각시가 긴 대롱을 꽃에 걸치고 수백 번, 수천 번의 날갯짓을 하며 꿀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 박각시마저 벌새쯤으로 보이더군요.

붕붕거리는 소리에 염소마냥 고개를 숙이고 나니 여우냄새가 나는 듯하고 내가 슬슬 미쳐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단단히 홀렸구나 싶은게 지금 일어나면 더 이상하게 바라볼 것 같아 아예 눌러앉아 여우꼬리를 붙들고 늘어졌지요.

판타지 세상이 한 번 받아들이면 순식간에도 드나들 수 있듯이 여우꼬리를 놓고도 백만 번도 넘는 길이 열렸다가 닫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보다 보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환하게 열리는 세상이 거기 있더군요.

그 다음은 스스로 벌이 되어 이 꽃 저 꽃 사이를 날아다녔지요. 여우한테 홀린 상태로 꽃마다 돌아다니다 보니 다리참에 노란 꽃가루가 조롱박마냥 매달려 있었고요. 내가 빌려 쓰고 있는 지구의 시간만큼 값지다 보니 아껴 써야 마땅하지만 이때만큼은 아무 걱정없이 붕붕거려도 좋다는, 정말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겠더군요.

미친다는 말이나 홀린다는 말, 꼴린다는 말, 끌린다는 말, 오질나게 논다는 말 들이 다 한통속이 된 것마냥 그렇게 불러도 좋을 것 같고, 그럴수록 마음이 넓어지고 저 끝없이 물들며 깊어가는 가을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더군요.

여우꼬리는 보숭보숭한 솜털을 가을볕에 드러내놓고 아직도 그 자리에서 누구를 홀릴 양으로 있겠지요? 나 같이 널널한 마음으로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고개처럼, 홀렸다 풀려나면 남가일몽이든 뭐든 눈앞에 있는 길이 아주 새롭게 느껴질테니 가을 한 자락에 한 번씩 홀려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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