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돋보기>

▲ 우암 송시열.
충북학연구소(김양식 박사) 회원들이 지난주 우암 송시열(1607~1689)의 발자취가 짙게 남아있는 괴산 화양구곡을 답사했다.특히 이번 답사는 내년 우암탄생 400주년을 앞두고 가진 행사여서,그 의미가 더욱 컸다.

조선시대 인물중 우암만큼 명과 암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인물도 드물다. 워낙 당쟁에 많이 휘말리다 보니 조선왕조실록은 그의 이름을 무려 3천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관련 논문은 인조 때 18번, 효종 136건, 현종 1천40건, 숙종 994건, 경종 33건, 영조 266건, 정조 86건, 헌종 7건, 철종 10건 등이 언급됐다고 밝히고 있다.

이를 합하면 2천625건이 된다. 여기에 직접 거명이 아닌, ‘송영부사’같은 우암의 별칭까지 합치면 3천번이 되다고 관련 논문을 밝히고 있다.

우암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그의 마지막도 비껴가지 않았다. 익히 알다시피 우암은 83세 때 ‘죄인들의 수괴’라는 애매한 죄목으로 사약을 마시고 사사당했다. 조선 역사상 역모가 아닌 경우 대신을 사형시킨 예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는 죽고 난 이후 다시 노론의 재집권과 함께 유학자로서의 최대 영광인 성균관 문묘에 공자와 함께 배향됐고, 유림들 사이에 공자 맹자 주자처럼 ‘송자’로 불리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우암이 태어난 곳은 충북 옥천이다. 그러나 말년의 우암은 고향 옥천이 아닌 괴산 화양구곡을 근거지로 삼았다. 묘소도 화양구곡에 있다. 언뜻보면 “뭐 어찌어찌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가들은 무엇인가 작용한 것을 보고 있다.

학자들은 먼저 ‘외가 콤플랙스’을 거론하고 있다. 사가들에 따르면 우암의 아버지 송갑도는 장인과 장모로부터 심한 구박을 당했다. 경제력이 없고 벼슬도 변변치 못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일설에 의하면 우암의 부친은 ‘그 무능’ 때문에 처가식구들로부터 “밥벌레” 소리를 자주 들었다. 이것이 우암에게 정신적 스트레스로 강하게 작용했고 따라서 그는 지금의 대전 회덕으로 이주, 삼촌 송중기와 함께 과거를 준비한다. 이쯤되면 우암은 ‘고향을 잃어버린 유학자’가 된다.

두번째 이유는 그의 독특한 ‘정치처세’에 있다. 우암은 권력욕은 강했지만 자신의 전면에 나서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툭하면 낙향해 이른바 ‘막후 조정자’ 위치를 즐겼다.

때문에 우암이 화양구곡을 근거지로 삼자 서인ㆍ노론 계열의 추종자들이 자연스레 운집, 기호사림 또는 산당(山黨)으로 불리는 ‘半政-半學’의 조직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경우 괴산 화양구곡은 한양서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곳이 된다. 괴산은 한양서 어떤 정치적 사건이 일어날 경우 사흘 안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눈여겨 볼 부분은 왜 근거지 이름을 ‘화양’(華陽)으로 정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도움을 준 명나라를 ‘은혜의 국가’로, 반면 명을 멸망시킨 청나라를 ‘반문명 오랑캐 국가’로 생각했다.

때문에 ‘사라진 중화사상을 조선서 꽃피우자’는 뜻으로 ‘화양’이라는 이름을 정했다. 언뜻보면 사대사상의 극치로 볼 수 있으나 은혜를 져버릴 수 없다는 ‘의리정신’이 깔려 있다. 이른바 ‘直사상’이다. 화양구곡은 단순히 풍관만 좋은 곳이 아니다. 우암의 복잡한 유년심리와 정치적 배경 그리고 외교의식이 깔려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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