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월의 크리스마스 (1998) '다림'

<캐릭터로 영화 읽기 한국 영화 속 그녀(들)>

지난 세기의 끝자락, 처음 다림(심은하)을 만나던 순간은 새로워서 낯설었다.무엇보다도 종전까지 멜로영화에서 여성에게 할당되던 그 자리-죽음의 그림자에 포획되거나 운명의 압제에 농락당하는 그 곳에 그녀는 없었다.과거에 대한 상실감과 예정된 운명 앞에서 고통을 홀로 곱씹으며 슬픔을 갈무리하던 남자 정원(한석규) 옆에서 생기있게 빛나던 자리가 바로 그녀의 것이었다.호기심을 감추지 못해,더 이상 아무 것도 궁금해하지 않는 남자에게 끝없는 질문 공세를 펼치고-"아저씨,왜 결혼 안했어요?" "사는 게 재밌어요?" "왜 나만 보면 웃어요?"-호의 또한 에두르지 못한다-"사자자리가 나랑 잘 맞는다고 하는데…".하지만 다림과 정원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 연애 이야기는 아무래도 이상하다.언제 쓰기 시작했나 싶은데,그만 느닷없이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그러고보면 다림이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이 어정쩡한 끝은 예고됐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정원의 여동생인 정숙(오지혜)과, 아마도 정원의 첫사랑이었을 지원(전미선)의 고등학교적 사진과 함께 나란히 유리창에 비친 모습으로 처음 나타난다. 지원과 다림. 과거의 여성과 현재 혹은 미래를 기약할 수도 있을 여성을 소개하는 장면이지만, 한편으로는 다림 또한 한 장의 사진으로, 유리창 '너머'에 위치하게 될 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시작도 끝도 없는 이 기이한 이야기에서 두 사람은 함께 하고자 하는 욕망을 키우지 못한다. 예정된 죽음 앞에서 미래를 써나가지 못하는 정원과 함께 과거로 시선을 붙박기에 그녀는 너무 젊다. 20년 동안 한 동네 살면서도 지겨운지 모르겠다는 남자의 호흡에 맞추기에 그녀의 피는 너무 빨리 뛰니까. "생각 나?" "기억하니?", 입만 열면 옛날 이야기를 꺼내는 정원과 달리 다림은 탈출을 꿈꾼다. 좁은 집에서 다섯 형제가 바글바글 사는 것도, 뙤약볕 아래 사진 찍느라 돌아다니는 것도 지겨우니까. 그래서 정원이 수시로 어딘가에 주저앉거나 마루에 드러누울 때 그녀는 서서, 걸으며, 끊임없이 움직인다.

정원은 창 '바깥'에서 서성이는 다림을 보면서도 '안'으로 들어올 것을 흔쾌히 청하지 않는다. 그냥 거기 보이기는 하지만 만질 수 없는, 존재도 부재도 아닌 중간쯤의 위치를 다림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응시의 순간을 사진으로 담아 고정시킨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남자의 주저와 두려움 때문에 '함께 하는 이야기'를 꿈꾸었던 여자에게는 선택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아버지 혹은 가부장이 되고자 하는 의지도 없는-굳이 죽음이 예정돼있지 않았더라도 이주를 꿈꾸고, 가족을 구성하는 어떠한 능동적 욕망도 키우지 않았을 것만 같은-정원은 여성을 적대시하거나 여성의 삶의 기획을 일거에 틀어버리는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여성과의 연대를 도모하지도 않는다. 그럼으로써 결과적으로 다림-여성-을 소외시키고 자신의 현재적 삶-과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배제시킨다. '진실을 알지 못하는' 다림은 고통받는 정원에게 어깨 한 쪽을 빌려주거나 따뜻한 손을 건네 줄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것이다.

# 쓰여지지 않은 성장서사

이 아쉬움은 정원의 사랑, 혹은 추억으로 갈무리된 다림에 대해 우리들이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아주 가끔, 책상에 앉아 편지를 쓰거나, 직장 동료에게 속내를 드러내는 모습에서 그녀를 찾을 수 있지만 그것 갖고야 턱없이 부족하다. 사진관이나 카페의 유리창 너머, 거울 혹은 정원의 카메라 뷰파인더 안에만 존재하는 그녀에게서 생생한 감정을 읽는 게 도무지 여의치 않은 것이다.

시점을 부여받지 못한 채 '정원이 바라보는 일상의 한 부분'이 되는 다림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은, 이 이야기가 크리스마스에 끝나는 정원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크리스마스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다림의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커진다. 설레는 가슴을 누르며 처음 립스틱을 샀고, 그리움인지조차 모른 채 거울을 보며 눈물을 훔쳐야했던 소녀가, 빨간 스카프에 검은 코트, 검은 부츠로 차려입은 성숙한 여자로 자라나는 이야기-다림의 성장서사로도 쓰여질 수 있었으리라는 부질없는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이다. 진실을 모른 채 총총히 사라져가던 그녀에게서 눈길을 거두기에는 한 밤중 사진관의 유리창을 박살내던 그녀의 분노가, 그 큼직한 돌멩이의 느낌이 너무도 생생하니 말이다. / 박인영·충북대강사

Character & Actress 심은하
21살에 MBC 탤런트로 연기생활을 시작한 심은하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다림역으로 호된 스크린 신고식을 치러야했다.무려 14번을 되풀이해야했던 첫 촬영의 당혹스러움과 "도무지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던 초조감은 단지 텔레비전? CF와 영화의 차이,혹은 '아찌 아빠'(1995)'본 투 킬'(1996)과 '8월의 크리스마스'간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그리고 그 시간들이 '배우 심은하'를 탄생시키는 진통으로 의미지어졌을 때 그는 "진짜 연기가 뭐라는 걸 알았다"고 진심으로 말하게 된다.

'8월의…'에서 눈부신 맨 얼굴의 미모를 과시하는 그는 범속한 우리네와 같은 지루함과 쓸쓸함, 활기를 고스란히 담아 우리 옆 자리에 살며시 앉는다.이런 캐릭터 혹은 여배우와의 만남은 실로 종전까지 없었고,혹은 그 이후로도 쉽게 충족되지 못하는 것이 됐다.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과거를 향하는 영화의 회고적 감성과 심은하의 단아한 고전미는 더할 나위없이 어울린다. 하지만 호기심과 호의를 솔직하고 발랄하게 드러내는 다림에게는 다른 모든 캐릭터들에 비해 정서적 적극성이 있다. 심은하가 갖는 생명력과 탄력성은 죽음에 대한 고즈넉한 관조로 생겨난 무채색 톤에 활기 그득한 유채색 톤을 자연스레 어울리게 하고, 그럼으로써 영화를 결정적인 퇴행성으로부터 구원한다.

'8월…'에서 심은하는 '마지막 승부'의 청순가련 이미지에 결정적으로 기대고 있기도 하다. 촬영 당시 26세였으나 마치 학생들 교복같은 주차단속원 유니폼을 입은 그에게서 다 자란 어른 여성의 성숙함을 찾기는 힘들다.일체의 섹슈얼리티를 배제한 그의 미성숙한 이미지는 영화에서 더없이 효과적이다. 심지어 롤리타 신드롬을 떠올리게까지 하는 그로 인해 해맑은 다림/심은하의 맨얼굴은 세월의 풍화작용에도 부식되지 않을 '첫사랑의 신화'에 안전하게 봉인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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